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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28 (23:42:21)
원본출처:   

영국 ART ROCK의 역사 제 10회

사회학 관점에서 바라 본 Progressive Rock
Progressive Rock의 쇠퇴기

 그동안 지루하게 (특히 필자에게) 여겨졌던 영국 ART ROCK의 역사가 이번회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사실, 이 특집은 50회 정도로 에정되었으나 Art Rock Magazine이 제때 발간되지 못했기 때문에 필자가 환갑이 되더라도 이 특집이 끝날 것 같지 않고, 또한 새로운 특집의 기획으로 인하여 서둘러서 문을 닫게 되었다. 그럼, 새루운 특집이란? 비밀이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언급할 수 없지만 지금까지 Art Rock에서 다루지 않았던 미지의 음악에 관한 내용들이 소개될 것이다. (편집자 주)
 
 도서관에서 음악서적들을 열심히 뒤적거리던 학창시절, 대중음악과 사회학에 관한 책들이나 논문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물론, 그들중 대부분이 반항적인 Rock 'n' Roll의 탄생과 당시 사회와의 관계를 다루거나, 사회적이거나 저항적인 Mordern Folk 그리고 자유, 반전, 평화와 사랑을 슬로우건으로 내걸었던 Psychedelic Music과 당시 정치, 사회 그리고 문화를 다루고 있었다. 그러나 Progressive Rock과 사회학을 다루었던 책이나 논문은 결코 찾아 볼 수 없었다.
 지난 여름, Edward Macan이라는 친구로부터 조그만 소포 하나가 도착되었다. 그 소포속에는 그가 오랫동안 집필해왔던 영국 Progressive Rock과 Counterculture에 대한 내용이 담겨져 있었는데, 놀랍게되 미국인의 시각에서 바라본 영국 Progressive Rock에 대한 분석은 지금까지 영국에서 발간된 책들이나 논문들 보다도 체계적이고 날카로웠다. 다소 아쉬운점은 그의 분석이 대형 그룹들에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었지만, 그의 글들이 이 지면을 써내려가는 필자에게 적지않은 도움을 주었다는 것을 밝히고 싶다.
 사실, Progressvie Rock과 사회학에 대해서는 지난 Art Rock의 역사 제1회를 비롯한 초창기 글들에서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이러한 음악이 발생하게 된 동기와 배경 그리고 그 사회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지면에서는 보다 심층적으로 Progressive Rock과 영국사회를 다루고자 한다.

EnglandMap.jpg


1. 영국 Progressive Rock의 사회 발상지
 영국 Progressive Rock의 사회적인 뿌리는 영국 남부에서 뻗어나왔으며 중산층과 대학가 그리고 영국 성공회(영국 국교회, Anglican Church)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우선, 첫 번째 지역으로 영국 나부지방중에서도 남쪽 Norfolk으로부터 동부 Essex, Cambridgeshire와 Lincolnshiredp 이르기까지 뻗어 나갔다. 그리고 두 번째 지역으로는 Kent 서쪽에서 Dorset, 북쪽으로는 Warwickshire까지 확산되었다. 세 번째 지역으로는 Cheshire와 Derbyshire 북부로부터 Yorkshire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을 포함한 Midlands 북부지역까지이다. 그리고 끝으로 스코틀랜드와 영국 국경지역, 즉 영국 북부지역까지 분포했다.
 영국 Progressive Rock의 주류는 역시 영국 남부에서 비롯되었는데, 1960년대말, 1970년에 결성된 대부분의 거물 그룹들이 이곳에서 결성되었다. 또한 1980년대 Neo-Progressive Rock 그룹들도 이곳에서 결성되어 그 맥을 이었다. 대부분의 주요 뮤지션들이 이곳에서 태어났으며(1942년생부터 1950년생에 이르기까지) 이곳에서 자라났다. King Crimson의 리더 Robert Fripp(1946년생)을 비롯, 그동안 Art Rock의 역사에서 언급되었던 대부분의 주요 뮤지션들이 영국 남부출신들이다. 그렇다면 Progressive Rock은 왜 영국의 남부지방에서 탄생하여 그곳에서 발전하게 되었는가라는 의문을 갖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의문은 당시 영국 남부의 사회, 역사, 문화적인 여건을 살펴보면 쉽게 해답을 얻을 수 있다. 영국의 남, 동부 지역인들은 다른 지역에 비하여 전문적인 White-Collar들의 사회였다. 그에 반해 영국의 중부와 북부는 Working Class와 Blue Collar가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실제로 Progressive Rock의 발생은 노동자층보다는 높은 교육을 받은 지식인층의 자녀들 즉, Classic 음악교육 뿐만 아니라 높은 문화의 예술과 문학을 배웠던 젊은이들로부터 발생했기 때문에 영국 남부지역이 Progressive Rock이 자라날 수 있는 토양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2. 영국 국교회(Anglican Church)의 기여
 사회-지역적인 요인 뿐만 아니라 영국 Progressive Rock의 탄생에는 종교적인 영향이 적지 않았다. 미국의 R&B가 흑인 성가음악에서 영향을 받았다면, 영국의 Progressive Rock은 영국13.png 국교회와 카톨릭 성7c8.jpg가에서 영향을 받았다. 특히 영국 국교회(Anglican Church)의 영향은 지배적이었다. 영국 국교회(성공회)는 로마 교황의 권위와 군주들간의 분쟁으로 발전했으며, 종교적인 불만으로 그 긴장감은 16세기 최고조에 이르른다. 헨리 8세의 이혼은 로마 교황과 결별을 야기(1534년) 시켰고, 영국의 교회들은 로마 카톨릭과 청교도로부터 대항하기 시작했다. 19세기 이래로 영국 성공회파(Anglican Communion)로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성서와 교회의 권위에 기초를 두고 있다. 운영체계는 교회 감독제이며 예배를 중시한다. 교리는 로마 카톨릭과 개신교의 교리를 수용하고 있므녀 1982년부터 로마카톨릭 교회와의 교류가 재개되었다.
 많은 Progressive Rock 뮤지션들이 어린시절 영국 국교회를 나갔으며, 그들중 교회 뮤지션으로 종사했었던 인물도 많다. 이러한 종교와 종교음악의 체험은 그들의 미래 음악에 무의식적으로든지 아니면 의식적으로든지 깊이 잠재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웅장한 파이프오르간의 도입, 입체적인 코랄, 하모니 양식등등... 우리가 Progressive Rock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이러한 음악적 요소들은 뮤지션들의 내면에 잠재해 있던 종교적인 성향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Genesis의 리더였던 Peter Gabriel은 소년시절 교회 소년합창단에 있었고, John Wetton은 자신의 형이 성가대 지휘자 및 오르간 주자로 활약하고 있을 때, 형의 보조로 일하면서 최초의 음악적 체험을 가졌다. 또한 Yes의 Chris Squire는 성 앤드류 성당의 소년 성개대에 있었으며, Soft Machine의 Mike Ratlledge는 캔터베리 성당의 오르간주자로부터 오르간 연주를 배웠다. 스위스에서 영국으로 건너온 Patrick Moraz도 Bournrmouth지역의 교회에서 오르간 주자로 활약했었다. King Crimson의 Robert Fripp은 종종 Anglican성가 음악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특히, 17세기 작곡가 Orlando Gibbons의 성가에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다. Keith Emerson 또한 인터뷰를 통해서 이러한 종교적 배경에 대하여 여러차례 언급한 바 있다. V.D.G.G.의 Peter Hammill은 영국 국교회 보다는 카톨릭 출신으로 양쪽 Anglican과 Catholic 교회를 위한 음악들을 작곡해TEjs 영국 르네상스 성가 음악들을 작곡했던 영국 르네상스 성가 음악의 거장 Thomas Tallis에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다.

Progressive Rock Mania
 모든 부류의 damdkr들에 특정팬들, 극성 팬들이 있기 마련이지만 Progressive Rock팬들은 타 장르의 Mania와 뚜렷이 구별된다. 우선, 영국의 Progressive Rock의 탄생기와 첫 번째 황금기 (1966~1970년대초)의 매니아들은 뮤지션과 다를 바 없었다. 그들은 뮤지션들과 같은 세대들(20대부터 30대까지)이었으며 그들 대부분이 영국 남동부에 거주했고, 사회-경제적으로 넉넉한 중산층들로 High Culture의 예술, 문학과 음악을 전공하던 사람들이었다. 한마디로 Progressive Rock 매니아들 중에서 우리는 쉽게 Progressive Rock뮤지션들을 찾을 수 있다. 또한 매니아 자신이 여러 형태의 Contributor로, Volunteer로서 참여하고 있다. 앨범과 공연 티켓의 구입등의 경제적 공헌 뿐만 아니라, 앨범과 팜플렛 디자인, 무대디자인 더 나아가서 앨범의 가사, 그룹의 보이지 않는 멤버로도 활약했다. 당시 뮤지션들과 Mania들의 관계는 친밀한 친구 관계였고, 서로 음악을 연주하고, 듣고, 평가하는 자연스러운 장이 열려 있었다. 실예로 1966년부터 런던 Marquee Club에서 개최도있던 “Spontaneous Underground" 씨리즈는 연주자와 청중과의 구별을 짓는 궇획선이 정해져 있지 않았다. 따라서 1960년대말까지 청중들은 자연스럽게 Pink Floyd, Nice, Soft Machine 그리고 Procol Harum등의 멤버들을 개인적으로 접촉할 수 있었다.
 1960년대말부터 1970년대초까지 소수에 지나지 않았던 Progressive Rock Mania들의 수가 급증하면서 연주자들의 무대가 영국 런던의 조그만 Club이나 Pub(클럽)등지에서 미국의 커다란 Arena나 Stadium(경기장, 큰 공연장)등지로 옮겨졌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영국 PrQ85.jpgogressive Rock그룹들의 미국시장 진출을 의미하는 것이다. Moody Blues, Pink Floyd, EL & P, Yes 그리고 Jethro Tull등이 그 행운의 주인공들이었다.
1970년대 초반, Progressive Rock Mania들은 직접 공연장을 찾는 것 보다 친구들과 어울려 집에 모여 음반을 감상하거나 무명그룹들의 공연장을 찾기 시작한다. 이때 제 2의 Pink Floyd, Yes, Genesis 그리고 Jethro Tull을 꿈꾸는 수많은 그룹들이 등장하게 된다. 이들중에는 뛰어난 기량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빛을 못보고 사라진 그룹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 자체가 Progressive Rock Mania로 출발 Progressive Rock Musican이 되었고 그리고 Progressive Rock Mania로 되돌아 가게 된다.

Progressive Rock의 상업적 성공과 혼란(1970년대 중반까지)
 위에서 잠시 언급되었던 행운의 그룹들(소위 수퍼그룹)은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 부와 명예를 동시에 얻었다. 1960년대 말까지만 하더라도 영국의 조그만 클럽에서 소수의 청중들 앞에서 공연을 했던 영국 그룹들이,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미국의 대형 공연장에서 수천, 수만명의 청중들 앞에서 공연을 하게 된 것이다. 이와 더불어 Progressive Rock계열의 음반 판매고도 천문학적 숫자까지 올라가기 시작했다. 1973년 3월 발매된 “The Dark Side Of the Moon"은 이 분야의 최고 판매고를 기록하며 Pink Floyd의 멤버들에게 엄청난 부와 명성을 가져다 주었다. 멤버들 모두 그리스의 섬에 휴양 빌라를 구입할 수 있었고, Roger Waters는 값비싼 프랑스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들을 수집할 수 있었으며, Nick Mason은 그동안 해왔던 자동차 수집에 더욱 열을 올릴 수 있었다. 쌓여가는 부와 함께 David Gilmour는 Guitar수집에, Rick Wright는 골동품 수집에 깊히 빠져들었다. 1980년대초 멤버들 간의 갈등 (Roger Waters와 나머지 멤버들 간의)으로 그들의 명예는 다소 실추되었지만 아직까지도 그들은 부를 누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 분야에서의 대표적인 행운아이자 불운아는 Mike Oldfield이다 그는 청소년 464.jpg시절, 틈틈이 작곡해왔던 Tubular Bells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다. Virgin Records의 창업자인 Simon Draper와 Richard Branson은 그의 데모테잎을 듣고 그를 스튜디오로 불러들였다. 그후 2,000회 이상의 오버더빙 끝에, 9개월만에 당시의 화제작 Turbular Bells는 완성되었다. 그 중 4분여되는 분량의 공포영화 엑소시스트의 테마 음악으로 사용되었고, 이 작품은 Headphone Rock으로 불리우며, 당시로서는 경이적인 1,600만장의 판매고를 올렸다. 그러나 레코드회사의 게약 때문에, 지속적으로 음반을 제작해야 되었고(그는 레코드 게약은 법정에서 형을 구형받은 것과 다를바 없다라고 말한다). 잇다른 음반 판매부진과 규모가 큰 무리한 공연으로 그가 잠시 얻었던 엄청난 부는 빚으로 바뀌게 되었다. 1982년 “Five Miles Out"에 수록된 Family Man이 엉뚱하게도 Hall And Qates에 의해 리메이크되어 히트하자 그는 ”Pop Song"을 만드는 것은 매우 제한적이고 지루하다“라고 표명했고 1984년 영화 사운드 트랙 ”The Killing Fields"로 잠시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옛 영광을 되찾으려는 의도로 20년만에 발표된 “Turbular Bells 2"는 기대이상의 성공은 거두지 못했다.
 197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대부분의 Progressive Rock그룹들은 활동을 중지한다. 이러한 공백기의 주요 원인은 그들 대부분의 음악적 방향이 불투명해졌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소속 멤버들은 그룹활동을 중지하고, 솔로 활동을 하거나 그룹을 완전히 떠나 버렸다. 이렇게 황혼기에 접어든 영국 Progressvie rock계genesis_pic_book.jpg와는 달리 이태리, 독일 그리고 프랑스의 Progressive Rock계는 황금기를 맞고 있었다.
 대부분의 수퍼그룹들은 1970년대 중반 이후부터 대중성과의 타협을 시작한다. Peter Gabriel은 뮤지컬 스타일의 더블 앨범 “The Lamb Lies Down On Broadway"의 발표와 함께 102차례의 순회 공연을 가진 후 Genesis를 떠나게 되는데, Peter Gabriel이 떠난 Genesis는 더 이상 Progressive Rock그룹이 아니라 Pop그룹에 가까웠다. 몇몇 수퍼그룹들을 제외하고대부분의 그룹들이아 아티스트들은 새롭게 불어오는 음악조류에 편승하게 된다. 1970년대 초반에는 많은 Pop Artist들도 거세게 몰아닥치는 Progressive Rock에 적지 않게 영향을 받았던 것처럼, 70년대 중반부터 Progressive Rock그룹과 아티스트들도 상업성에 서서히 물들기 시작했다. 그 이후 Punk Rock의 출현, Disco의 열풍등으로 Progressvie Rock이 설 자리는 점점 사라져 갔고 Progressive Rock의 주류(Mainstream)는 이때부터 1990년대 몇몇 북구 신생그룹들로부터 일어났던 ”과거로의 귀환운동“이 일어나기 전까지 사실상 맥이 끊어지게 된다.

1976년부터 1970년대말까지
 1975년부터 King Crimson은 활동을 중지했고, Genesis는 Phil Collins가 Peter Gabriel의 역할을 해나가면서 급작스럽게 Pop그룹으로 변모해갔다. Pink Floyd는 두 번째 휴지기를 맞으며 Roger Waters의 솔로 프로젝트 그룹으로 점차 전락하기 시작했으1030.jpg며, Yes 역시 공백기를 맞으며 Jon Anderson을 비롯 각 멤버들이 자신의 솔로앨범 제작에만 몰두했다. 영국 Progressive Rock의 공황기인 1975년과 1976년, 이 휴지기 동안에는 수퍼 그룹들의 Best앨범, 실황음반들만이 쏟아져 나왔고 영국 Progressive Rock의 역사를 간신히 연명해 나가는 시기였다. 다만, Jethro Tull과 V.D.G.G. 그리고 Hen교 Cow등만이 이 기간에 폭넓은 활동을 벌였을 뿐이다.
 1976년 여름, Punk가 런던을 강타했고, 1976년말부터 1977년까지 Disco가 전 세계 음악시장을 휩쓸면서 Progressive Rock시장은 급속도로 위축되었다. 이 기간은 각 그룹의 음악적 분기점이기도 했다. Pop지향으로 돌아선 Genesis에 이어 EL & P가 “Works I"을 발표한 직후 ”Works II"와 함께 사향길을 걷기 시작한다. Renaissance는 “Novella"와 ”A Song For All Season"를 발표한 후 Pop그룹이 되었다. 그러나 이 기간 중 UK의 출현은 영국 Progressive Rock의 끈질긴 생명력을 실감하게 했다.ELO201.jpg
 이에 반해, 영국 Progressive Rock의 쇠퇴기에 적절히 상업성을 띤 Pomp Rock(Symphoni Pop, Orchestral Pop)계열의 그룹들은 이 시기에 커다란 성공을 거두게 된다 Electric Light Orchestra, Supertramp, The Alan Parsons Project등은 Progressive Rock 그룹들의 특징을 지니고 있으면서 상업성까지 강하게 함축하고 있었다. 1971년 버밍햄에서 결성된 E.L.O.는 Move의 후신 그룹으로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E.L.O.는 라이브 무대에서 시청각을 중요시하는 Progressive Rock으 전형적인 라이브 무대를 연출하기도 했고, 역시 Pop에 Classic을 도입 가벼운 Progressive Rock스타일을 유지하여 보다 쉽게 청중들에 다가 설 수 있었다. 1960년대말에 결성된 Supertramp는 1970년대 중반부터 대중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역시 상업성이 깃든 가벼운 스타일의 Progressive Rock을 행하면서 “Even In The Quietest Moments(1977)"와 ”Breakfast In America(1979)“등의 앨범들로 전세계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엔지니어, 제작자로 유명한 Alan Parsons에 의해 결성된 프로젝트 팀 The Alan Parsons Project 역시 영국 Progressive Rock의 쇠퇴기에 결성되어 가벼운 Progressive Rock스타일로 성공한 대표적인 그룹이었다.

1980년, Neo-Progressive Band의 출현
 국내 FM방송에서 본격적으로 Progressive Rock이 소개되기 시작AlanEriclarge.jpg했을 때, Progressive Rock의 종주국 영국에서는 Neo-Progressive Band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The Silmarillion(후에 Marillion), IQ, Pallas, Zeus Pendragon(후에 Pendragon), Art, Solstice, Twelfth Night등등이 대표적인 그룹들이다. 이들은 영국 남부에서 대부분 결정되었던 선배 그룹들과는 달리 보다 폭넓은 지역에서 결성되었으며 주로 대학가에서만 인기를 누렸다. Twelfth Night은 Reading대학 출신들로 리딩에서 결성되었고, IQ는 Southampton에서, Zeus Pendragon은 Gloucestershire에서, Silmarillion은 옥스퍼드 근교 Aylesbury지역에서 그리고 Pallas는 스코틀랜드 수도 Glasgow에서 결성되었다. 선배들이 1960년대 말에 활약했었던 런던의 Marquee클럽이 역시 이들의 주요무대가 되어주었는데 Solstice만을 제외하고 이들의 사운드는 Peter Gabriel이 이끌었던 Genesis전성기 시절의 음악을 표방했다. 10년전 선배들과 이들의 사운드가 확연히 다른점은 보컬이 Punk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는 점과, 연주가 1980년대초 New Wave처럼 보다 Electric Sound가 강조되었다는 점 그리고 여러 면에서 사운드가 단순해졌다는 점이다. 가사나 스케일면에서도 간단 명료해졌으며, 사운드가 보다 기계적이며 차갑다. 선배가 아날로그라면 후배인 Neo-Progressive Rock Band는 디지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정통 Progressive Rock과 Neo-Progressive Rock 굳이 비교할 필요는 없다. 서로 별개의 음악 영역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2009.02.03 (13:37:19)
프럽
너무 좋은자료..한마디로 감동적인 자료였어요...감사해요..hunchuri.tistory.com 에 비공개로 퍼가요...좋은하루 되세요...
(*.186.119.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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