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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11
마음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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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수 : 17672
2010.05.16 (22:01:18)
ARTIST:  Led Zepplin 
COUNTRY:  U.K. 
GENRE:  Prog Related, Hard Rock, Blues Rock, Folk Rock, Rock, Film Soundtrack 
ALBUM:  Jimmy Page (guitar, mandolin, pedal steel, theremin, backing vocals), Robert Plant (vocals, harmonica, tambourine), John Bonham (drums, percussion, backing vocals), John Paul Jones (bass, keyboards, Mellotron, mandolin, acoustic guitar, backing vocals) 
MEMBER:  Jimmy Page (guitar, mandolin, pedal steel, theremin, backing vocals),
Robert Plant (vocals, harmonica, tambourine),
John Bonham (drums, percussion, backing vocals),
John Paul Jones (bass, keyboards, Mellotron, mandolin, acoustic guitar, backing vocals) 
원본출처:  http://koreanrock.com/wiki.pl?LedZeppelinBio 
레드 제플린..데뷔에서 영광까지..
월간팝송 1987년도 1월호

  • Led Zepplin 결성 이전

Jimmy page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곧 그룹 Neil Christian and The Crusaders에 가입했다. 지미 페이지로서는 최초의 그룹 참가였다. 그 당시 지미는 열렬한 레코드 수집 소년이었고, 엘비스 프레슬리와 리키 넬슨의 디스크를 많이 수집하고 있었다. 지미가 처음 가입한 그룹에서 활동하고 있는 동안, 리더인 닐 크리스쳔은 R&B 계통에 끄려, R&B를 그들의 주분야로 삼고 있었다.
그러나 그룹 활동이 그럭저럭 궤도에 올랐을 즈음, 지미는 갑자기 전염성 혈액병에 걸려 그룹을 떠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혈액병에 걸린 몸으로는 강행군이 계속되는 그룹 활동을 도저히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실의에 빠진 그는 한동안 집에서 요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몸이 다시 회복되자 음악에 대한 꿈을 포기할 수 없어 Cyril Davis All Stars 란 그룹에 가입했다. 올 스타즈에서 다시 활약을 시작하면서 그는 기타리스트로서 능력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의 실력이 주위에 알려지면서 그는 또 한번 그룹을 옮기게 되었는데 그가 처음으로 레코딩에 참가한 것도 이때였다. Carter Lewis의 < Your Mama's Out Of Town > 싱글이 나온 것도 이즈음인데 여기에서 지미가 보여준 기타 플레이는 주위의 비상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하여 지미는 세션맨으로서 알려지게 됐다.
그는 제일선에서 활약을 하게 되자, 열심히 연주를 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피나는 공부를 계속 했다. 약간 알려진 세션 맨 정도로는 도무지 만족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1963년에서 1965년까지 2년 동안 지미는 가장 잘 팔리는 세션맨으로 활약했으며 세션기타리스트로 일하는 동안, disortion이나 feedback 테크닉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이것을 적극적으로 연주 테크닉에 활용하는 방법을 연구했다. 그리고 기타 연주에서의 재빠른 운지법도 연구했다. 그러면서 지미 페이지의 기타 사운드는 서서히 확립되고 있었으나 레코드 세션에서는 지미의 재능이 별로 발휘되지 못했다. 악보에 있는 그대로를 하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임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솔로 아티스트의 레코딩에 참가할 때는 그의 독창성을 발휘하곤 했다.
지미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프로듀서 C.L.Tarumi를 알게된 것도 세션을 통해서였다. 시.엘.타루미라면 그 당시 최고의 그룹들을 지휘하는 막강한 프로듀서였다. 지미의 역량을 높이 평가한 타루미는 자기가 프로듀스하고 있는 그룹의 레코딩 작업에 지미를 자주 참가시켰다.
세션 업무를 계속해 오던 어느날 지미는 Andrew Oldum이라는 사나이로부터 인정을 받게 되어 하루 아침에 앤드류 올덤이 경영하는 레코드 회사의 레코딩 디렉터 겸 프로듀서의 자리에 앉게 됐다. 이러한 인연으로 지미는 고기가 물을 a만난 격이 되어 자기가 가진 모든 역량을 발휘하여 디렉터이자 프로듀서, 플레이어 겸 작곡에까지 손을 댔다. 그야말로 지미의 활약은 눈부신 것이었다.
여기서 특기할 만한 것은 이 시기에 지미는 여러 차례 에릭 클랩톤과 일을 같이 한바 있었다.
그런데 한가지 이상한 점은, 이 당시에 지미가 활약한 일들은 별로 기록이 없고, 자신이 그 당시의 일들을 일체 입 밖에 내질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위에서는 이 시절를 < 지미의 수수께끼 시대 >라고 평가하고 있다. 과거를 돌이켜 봤자 별로 유쾌한 추억도 아니어서 그 당시의 일을 일체 함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는데 그렇다면 지미로 하여금 별로 유쾌하지도 못한 그런 추억이라면 과연 어떤 추억일까?지미의 모든 것 가운데에 알려지지 않은 것이 바로 여기에 있는데, 아마도 영원한 수수께끼가 될 것 같다.

  • YARDBIRDS

이즈음 음악유행의 대세는 크게 변해가고 있었다. 브라스(brass) 세션과 요란한 스트링을 대거 기용한 편곡 경향이 음악업계를 크게 지배하기 시작한 이 경향은 자연히 실험적인 기타 플레이의 길을 막는 결과가 됐고, 지미 페이지도 세션 기타리스트를 포기하기에 이른다.
the_yardbirds.jpg 1966년 6월, 야드버즈의 베이시스트인 Paul Samuel Smith가 그룹을 탈퇴하자, 그 대신 지미 페이지가 들어갔다. 그가 들어가게 된것은 그야말로 하루 저녁에 결정된 일이었다. 이때 야드버즈는 사무엘 스미스의 탈퇴로 한 팔을 잃은 딱한 처지에 놓여 그 누군가가 있어야만 계속 활동을 할 수 있었다. 그 때 후보 선수격으로 기용된 것이 지미 페이지로 처음 그룹 가입 조건은 정식 멤버가 임시 멤버로 언제라도 정식 베이시스트가 결정되면, 그때 그만 둔다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몇주가 지나도 야드버즈는 새로운 베이시스트를 구하지 않고 지미 페이지를 정식 베이시스트로 앉혔다. 그 뒤 Chris Dreja가 베이스를 담당하게 되면서, 지미는 다시 기타로 전향하여 제프 백과 함께 트윈 리드를 담당하여 그룹의 사운드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게 된다. 트윈 리드를 맡은 제프 백과 지미 페이지는 학교 다닐 때부터 친하게 지내온 학우였다.
제프 백과 지미 페이지는 모두가 기타를 그 누구보다도 사랑했고, 서로 기타를 만들기도 하고 개조하기도 하면서 선의의 경쟁을 해온 다정한 친구 사이였다.
지미 페이지가 처음으로 산 기타는 1949년 제작된 Les Paul로 당시에 200 파운드였던 이 기타를 월부로 구입했다.
지미 페이즈는 야드버즈와 함께 주로 미국과 구라파 투어를 했다. 그러나 그것은 대규모의 콘서트라기보다는 대학 구내의 연주나 술집에서 연주하는 정도의 경험을 쌓기 위한 투어라고 봐야 옳을 것이다.
그러는 동안 야드버즈는 꾸준한 성장을 계속하고 있었다. 세계적인 음료인 코카 콜라의 CM에도 출연을 했고, MGM에서 만든 액션 영화에도 특별 출연을 한 적이 있다. 이 영화에서 제프 백은 흥분해서 기타를 부수는 커트를 실감나게 해냈고, 야드버즈는 < Stroll on >등 몇 곡을 영화 속에서 연주하였다. 이 때 연주한 실황을 사운드 트랙으로 내놓았는데 별로 많이 팔리지는 않았다.
1966년 9월, 야드버즈는 롤링 스톤즈등 여러 그룹과 영국 투어을 했다. 이 투어에서 야드버즈는 거의 완숙한 그룹이 되었는데, 이 투어를 끝내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서, 제프 백은 정식으로 그룹을 떠났다. 제프 백이 떠난 것이 야드버즈에게는 큰 타격이긴 했지만, 그 후임을 구하지는 않았다. 남은 4명의 멤버가 똘똘뭉쳐 4인조 편성의 그룹으로 활동을 했다.
그즈음 야드버즈는 영국에서도 레코드를 내놓았지만 영국에서의 반응은 미국 에서 데뷔했을 때보다 냉담한 편이었다. 뒤이어 미국에서는 야드버즈의 새로운 앨범이 미국에서 출반되었다. 첫 앨범의 제목은 그대로 'Little Games'였다.
야드버즈는 미국에서 3장의 싱글 히트를 냈다. < Little Games >, < Ten Little Indians >, < Ha, Ha, Said The Clown >였다. 그리고 마지막 멤버로 구성된 야드버즈가 내놓은 최후의 싱글은 < Goodnight Sweet Josephine >였다. 그런데 이 마지막 싱글은 지금 1장에 400 달라를 호가하고 있다. 왜냐하면 처음 출반되자마자 생산 중지를 했기 때문이다. 곡이 좋아서라기 보다 희귀 디스크란 점에서 값이 오른 것이다. 그런데 야드버즈의 디스크로 또 하나 수집가들의 구미를 끌고 있는 디스크가 있다. 'Live At The Anderdon Theatre'란 타이틀이 붙은 라이브 앨범이 생산 중단된 이유는 공연 현장의 소음이 너무 들어가서 연주가 들리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야드버즈의 희귀 앨범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수집가들이 노리는 아이템이 되고 있다.
그즈음 야드버즈 사운드는 이른바 사이키델릭 사운드라 불리우는 것이었고, 지미 페이지는 이미 < I'm Confused >를 연주함에 있어 바이올린의 활을 사용하고 있었다. 극동 지방 투어 뒤, 야드버즈는 대학의 캠퍼스와 그밖에 소규모 공연장에서의 공연을 위해 영국으로 돌아왔다. BBC의 라디오 프로그램인 'Top Gear'에도 출연할 정도로 자리를 굳힌 야드버즈 였지만, 그룹의 각 멤버들은 더 이상 그룹 활동을 하고 싶어하는 의지를 상실한 상태였다. 야드버즈의 마지막 콘서트는 1968년 7월, 루튼 공업 대학에서 있었다.
야드버즈는 실험적인 "팝 록 뮤직"을 탄생시킨 선구자 역할의 그룹이라고 할 수 있었다.

  • NEW YARDBIRDS

Chris Treasure는 야드버즈 해산 뒤에도 지미 페이지와 손을 잡고 NEW YARDBIRDS를 결성할 예정이었으나, 뒤에 그는 마음을 바꾸1968-09-13_new_yardbirds.jpg 어 음악과 아주 결별을 하고 상업 사진과 상업 디자인 쪽으로 방향을 돌리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이러한 트레져의 결심은 지미에게 두가지 임무를 부여한 셈이 되는데, 그 하나가 야드버즈의 이름을 지미가 계승해야 되며, 그 명예를 살려야 한다는 어떤 의무감 같은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미 야드버즈의 이름으로 스칸디나비아의 여러 나라에서의 투어를 계약한 책임의 수행이었다.
지미 페이지는 Peter Grant와 함께 Super Hype Recording이라는 회사를 차렸다.
이 회사를 차림으로써 지미는 지금까지 야드버즈 시절의 프로듀서 Micky Most와 결별하게 됐다. 피터 그랜트는 야드버즈 때부터 일을 함께 해온 다정한 친구이면서 지미에게는 헤어질수 없는 마음 맞는 동업자였다. 지미 페이지가 새로운 그룹을 구상하고 있다는 소식에 접한 John Paul Jones는 재빨리 지미에게 연락을 해서 새 그룹에 참가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그 뒤 지미는 Terry Record가 추천하는 Robert Plant라는 사나이를 만나러 갔다. 로버트의 스테이지를 방문, 그의 스테이지를 샅샅이 살펴본 지미는, 돌아가서 존 폴애개 첫눈에 들었다고 했다.
이제 새로운 야드버즈를 출범시키자면, 유능한 드러머만 있으면 되었다. 처음에 지미는 B.J Wilson을 유한 후보로 생각하고 있었으나, 로버트는 그와 친한 사이의 John Bonham을 밀었다. 로버트가 너무도 성의껏, 그리고 강력히 추천을 했기 때문에 지미도 로버트의 의견에 따르기로 했다. 그 때 존 보넴은 정중하게 거절을 했다. 존 보넴은 그동안 몸담고 있던 팀 로즈와의 결별이 애석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해서 어렵게 재출발한 새로운 야드버즈는 이름도 그대로 야드버즈를 계승, NEW YARDBIRDS로 정했다. 이렇게 정한 것은 야드버즈에 대한 애착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주위의 흥행사들이 새로운 이름을 지어 출발할 경우 콘서트 개최에 어려움이 많다는 의견에 따르기로 한 것이었다.
존 폴 존스는 처음 넷이서 만났을 때의 얘기를 이렇게 회상 하고 있다.
'아주 작은 방이었어요. 우리 넷이 들어서니까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작은 방이었는데 그 방안에는 앰프가 가득했죠. 그런데 그 앰프는 구식에다가 고물이었죠. 로버트는 내가 세션 뮤지션이란 것을 알고 있었는데, 어떤 녀석이 올까 하고 기다렸다고 하더군요. 셋이 기다리던 방에 내가 들어섰죠. 서로 악수를 나눈 뒤에 잠시 침묵을 지키던 지미가 말을 시작하더군요. "자! 전원이 모였군! 그런데 우리는 이제 뭣을 연주하지?"하면서 그 당장에 곡을 정하자는 것이었어요. 우리는 그날 몇곡 연주곡을 정했읍니다. 그룹을 결성하는 데는 몇 달이 걸렸으나 곡을 정하는 것은 단 한시간 끝났죠. 그런데 보통 다른 그룹의 경우는 정반대예요. 결성은 쉽게 됐지만 곡을 결정하는데 에는 몇달씩들 걸리거든요.'
존 폴 존스는 스튜디오 뮤지션으로는 최고급이었다. 그는 미키 모스트의 눈에 들어 업계의 최연소 음악감독으로 발탁될 정도였다. 또 그가 참가한 최초의 레코드는 'Land of 1000 Dancer's'였다. 그 뒤 Herman's Hermits의 영화 음악을 담당하기도 했는데 무엇보다도 존 폴 존스가 자랑할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든 손에 쥐기만 하면 명연주를 할 수 있는 연주 기법 이었다. 그는 피아노뿐만 아니라 베이스, 올갠등의 악기를 신동이 다루듯 능숙하게 연주해 1960년대 영국의 탑 아티스트로서의 손색이 없었다. 존 폴 존스가 뉴 야드버즈에 참가하기 전에도 지미와 함께 레코딩을 한 적이 있다. 함께 레코딩한 앨범으로는 'Sunshine Super-Man'이 유명했다. 존 폴의 아버지는 피아니스트겸 편곡자로 상당히 이름이 나있었을 뿐 아니라 그의 어머니는 가수로서, 또 발레리나로서 활약한 유명한 사람이었다. 존 폴은 다른 예술가의 아들처럼 처음에는 피아노 공부를 했다. 피아노의 실력을 어느 정도 쌓은 뒤 그는 올갠 공부도 시작했다.
나중에 피아노는 뒷전에 미루고 올갠 연주에 더 열을 올렸는데, 그가 올갠 쪽으로 기울였던 것은 천성이 저음을 좋아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여튼 그는 올갠에서 배운 저음의 세계를 유감없이 발휘하는 뮤지션이 된 것이다. 베이스의 부드러운 음의 세계에 포로가 된 그는 달라스 텍시드 베이스와 사제 앰프를 사가지고 자기 동네에 있는 아마추어 그룹에 참가하면서 본격적인 음악의 세계에 발을 들여 놓았다. 그 뒤 그는 롤링 스톤즈의 앨범 'Their Satanic Majesties Request'의 레코딩에도 참가한 경력이 있다. 로버트 플랜트 역시 다채로운 경력을 가진 일류급 뮤지션 이었다. 중고등학교의 과정을 줄곧 우등으로 졸업한 그는 공인 회계사 자격시험을 목표로 공부하는 소년이었다. 그러나 우연한 기회에 동네 모던 재즈 그룹의 멤버들과 사귀면서 음악에 큰 흥미를 갖게 되었다. 로버트는 아래와 같이 회상하고 있다.
'내가 찾아간 곳은 모던 재즈를 연주하는 아마추어 그룹의 연주장이었는데, 그 곳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나를 사로 잡았어요. 그 때 나도 한번 해봤으면 하는 마음이 생겼죠. 그런데 나는 한번 호기심을 갖게 되면 그 일을 하지 않고는 못배기는 성미거든요.'
이렇게 해서 음악으로 급선회한 그는 버밍엄에 있는 몇몇 밴드를 거쳤다. 이 때 거친 밴드 가운데 로버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밴드가 The Band Of Joy였다.
이 밴드에 있을때 로버트는 그가 좋아하는 음악을 모두, 그리고 마음껏 연주해 보고 훈련을 할 수가 있었다.
로버트 플랜트와 지미 페이지는 두 사람의 공통점을 살펴보면, 우선 1950년대 초기의 미국 팝계에 열광적인 호감을 가진 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즈음 로버트 플랜트는 엘비스 프레슬리에 심취해 있었다. 이른바 록 뮤직 태동기의 에너지에 누구보다도 심취했고, 여기에 열광적인 취향을 드러낸 점이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다.

  • 초기의 솔로 레코딩

존 보넴을 제외한 다른 레드 제플린의 멤버는 제각기 자기 단독의 싱글과 앨범을 내고 있다. 지금에 와서는 이들의 디스크가 수집가들의 좋은 아이템이 되고 있고, 그 가운데 대부분의 디스크가 1장에 100달러 이상 호가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 디스크가 출반된 당시에는 거의 팔리지 않는 하찮은 것들이었다. 존 폴 존스는 1장의 싱글을 1964년에 PYE에서 내놓은 적이 있으며 지미 페이지도 1965년에 싱글 1장을 내놓았다. < See Just Satisfies >라는 싱글인데 대부분의 파트를 지미 혼자서 연주한 One man band 싱글이다. 이 싱글에서 지미는 드럼 이외의 모든 악기를 혼자서 맡았고 드럼은 보비 그레엄스가 맡았다. A면의 보컬도 지미가 취입을 했고, B면의 기악 부분에서는 하모니커까지 불었다.
그러니까 지미가 1인 10역을 한 곡이 바로 < See Jsut Satisfies >이다.
1967년 로버트 플랜트는 CBS레코드 사와 계약을 맺고 취입을 하게 되었으나 프로듀스의 방향이 로버트의 기분에 맞지 않아 중단했다. 그러나 로버트는 그의 나이 18세 때 < Our Song / Laughing Crying Laughing >과 < Long Time Comming /I've Got A Secret >의 2장을 내놓은 바 있다.
그 밖에도 레드 제플린이 결성되기 전에 각 멤버가 참가해서 내놓은 앨범이 있다. 그것은 우연한 기회로 함께 일을 한 것이었는데, Liberty에서 출반한 < Three Week Hero >가 그것이다. 1969년에 나온 이 앨범은 멤버 4명이 모두 백뮤직에 동원되었다. 그리고, Family Dog의 ' A Way of Life '라는 앨범에서는 로버트 플랜트를 제외한 3명의 멤버가 참가하고 있다. 또 지미 페이지만 존 폴 존스가 참가한 것으로는 1970년에 출반된 어틀랜틱의 앨범이었다.
존 보넴은 다른 3인처럼 솔로를 내놓은 적은 없으나 여러 그룹에 참가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하여튼 이러한 쟁쟁한 멤버들이 의기투합해서 일을 꾸미기 시작한 것인데, 지금까지 이토록 특이한 재줏군이 한데 모인 예는 일찌기 없었다. 그것은 왕년의 비틀즈의 구성과도 유사한 점이 많았다. 네 사람은 일기당천의 음악적 재능을 가졌는데 그 재능은 서로 이질적인 특성을 가졌고 그 이질성은 완벽하게 화합할 수 있는 묘한 테크닉이 넘쳤다. 여러 갈래의 음악적 소양을 가진 점에서 레드 제플린의 준비작업은 차질없이 진행되어 갔다.
이들이 가장 먼저 착수한 작업은 "그룹으로서의 통일된 사운드의 창조"였다.
그들은 블루스와 야성적인 사운드를 바탕으로 한 록을 창조해 내면서 여기에 소울풍이 넘치는 강렬한 저력의 보컬을 융합시키는 작업이었다.
이리하여 새로 출범한 레드 제플린의 곡은 각 멤버가 한결같이 자기의 재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었고 그들이 지향하는 그 어떤 새로운 시도로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었다.

  • 최초의 투어

로버트는 처음 녹음할 당시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정말로 감격적인 나날의 계속이었어요. 하루하루가 마치 천국에서라도 지내는 그런 즐거운 나날의 계속이었는데 그것은 창조하는 즐거움이요. 일에 쫓기는 즐거움이기도 했죠. 언제나 나는 나의 목소리를 테입을 통해서 들을 때면 야롯한 감정에 빠지는데 특히 < How Many More Times >를 레코딩 했을 때의 감격은 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
미국에서는 야드버즈 당시 얻어놓은 지미의 평판과 Dusty Springfield의 추천도 있어 별로 어렵지 않게 어틀랜틱 레코드사와 계약을 맺었다.
lz19681230_04.jpg 계약 금액은 공식적으로 발표되지 않았으나 20만 달러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런던에 있는 올림픽 스튜디오에서 레코딩된 앨범은 1968년에 완성되었다. 이에 앞서 그룹은 스칸디나비아로 연주여행을 했고 뒤이어 10월에는 런던에서 여러차례 콘서트를 가졌다. 10월 16일 Marquee에서 가진 콘서트는 뉴 야드버즈란 이름으로 처음가진 런던에서의 공연이었는데 이 공연을 가진 직후 그룹의 이름을 바꾸었다.
1968년 10월 하순에 살레 대학에서 콘서트를 가질 때 Led Zeppelin 이라는 새로운 그룹명으로 데뷔했다. 그러니까 레드 제플린의 데뷔는 그룹 명칭의 개명일뿐 어떤 새로운 점은 없었다.
매니저인 피터 그랜트는 영국에서 선을 보인지 얼마 안되는 레드 제플린을 곧 미국 투어로 몰고 갔다.
투어 계획은 미국의 중소 도시를 누비는 광범위한 것이었다. 주위에서는 너무 요란한 스케쥴이라고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피터 그랜트는 레드 제플린이 미국의 청중 깊숙이 파고드는 길은 그것 밖에 없다고 양보하지 않았다. 이러한 레드 제플린의 계획이야말로 미국이라는 어마어마한 레코드 시장을 정복하기 위한 치밀한 계산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당초의 작전은 그대로 적중했고 성공했다.
이 첫 투어여행에서 레드 제플린은 권위있는 Boston의 Tea Party 클럽에 출연했다. 존 폴은 이 때의 감격을 록 저널리스트인 스티브 로젠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만 4시간동안 계속 연주를 했죠. 그런데 그 때 우리는 1시간 반정도 연주할 곡밖에는 밑천이 없었어요. 그런데도 우리는 무난히 4시간 연주를 해냈고 성공을 거뒀죠. 그럼 어떻게 밑천도 없이 4시간을 버텼냐고 하시겠죠?우리 넷 중에 누구 하나라도 알고 있는 곡이 있으면 모두 털어놨읍니다. 한 사람만이 곡 전부를 알고 있고 남은 멤버는 그 곡의 첫 소절만 알고 있으면 그것으로 무난히 한 곡을 끝낼 수 잇었죠. 모두가 천재적인 기량을 가졌기 때문에 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Jack Biley에서 비틀즈의 곡까지 거의 연주했읍니다.'
이 투어에서 레드 제플린은 그야말로 용으로 변신했다. 어제까지 한마리의 미꾸라지 격이었던 레드 제플린이 열광적인 환호를 받는 그룹으로 각광을 받은 것이다.
그 어느 도시에서도 처음 3곡쯤 연주하는 동안은 잠잠했다. 그러나 4곡 5곡째로 접어들기 시작하면 핵폭탄이 연쇄적으로 폭발하는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샌프란시스코 무대에서는 그 어느 그룹이 세웠던 기록도 앞질렀다. 제플린은 이제 세계정상에 오르는 그룹으로 바뀌고 있었다.
이 투어에서 그들은 앨범 수록곡을 라이브 녹음에 맞도록 손을 봤다. 또 존 보넴이 카마인 어피스와 알게 된 것도 미국 순회 공연중의 일이었다.
미국 투어를 성공리에 마친 레드 제플린은 영국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영국에서 그들은 미국에서의 청중과는 전혀 다른 반응을 맞았다. 그들의 레코드가 아직 영국에서는 판매되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제플린에 대한 평판은 그저 그런 것이었다. 물론 연주회장은 어디서나 만원이었다. 그러나 미국에서 보여준 광적인 환호성은 없었다. 이러한 청중의 반응은 제플린으로 하여금 커다란 방향 전환을 하게 만들었다. 즉 제플린은 그들이 집중적으로 노리는 시장을 미국에다 두기로 결정을 한 것이었다. 아닌게 아니라 미국은 젊은이들 취향의 음악을 받아들이는 그런 분위기가 충만해 있었다. 이런 분위기를 제플린은 재빠르게 눈치를 챈 것이다.
이러한 제플린의 결정에는 도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미국에서는 그 어디보다도 제플린의 음악이 방송을 타기 쉬운 여건에 있어 제플린을 좋아하는 청중과 쉽게 음악적인 교류가 이루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 첫 앨범

'Led Zepplin'이라 이름 붙인 이들의 첫 앨범은 1월에 미국에서 출반되었다.
영국에서는 미국보다 2개월 뒤인 3월에 선을 보였다.
앨범 재킷의 디자인은 The Who의 John Entwistle과 Keith Moon의 아이디어로 완성되었다. 이 두 사람은 Led Zeppelin이라는 그룹의 이름도 지어준 기발한 아이디어 맨으로 이름 나있다.
새 앨범에 수록된 곡은 모두 9곡.
Side 1

  • Good Times Bad Times

  • Babe I'm Gonna Leave You

  • You Shook Me

  • Dazed And Confused

Side 2

  • Your Time Is Gonna Come

  • Black Mountainp Side

  • Communication Breakdown

  • I Can't Quit Your Baby

  • How Many More Times

< Good Times Bad Times >는 데뷔 앨범을 장식하는 화사한 곡으로 무척 친근감을 준다. 아주 세련되게 엮어가는 기타의 커팅과 드럼 워크가 전곡을 누벼, 듣고 있노라면 절로 신체의 리듬감을 불러 일으킨다.
< Babe I'm Gonna Leave You >는 정통적인 포크 송을 소재로 한 것으로 마치 공습 경보의 사이렌 사운드 효과가 삽입되어서 특이한 분위기를 조성해 준다.
< You Shook Me >와 < I Can't Quit You >의 2곡은 윌리 딕슨의 블루스 넘버를 기초로 해서 만든 곡이다. 여기서 레드 제플린은 소울풍의 분위기 지향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다.
< Communication Breakdown >과 < How Many More Times >는 그야말로 라이브 취향을 잘 드러낸 곡으로 로버트 플랜트의 정열 넘치고 드라마틱한 보컬이 압도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다.
< Your Time Is Come >은 사랑에 실패한 사나이가 자기에게 등을 돌린 여성에게 사랑 대신 질투의 불을 태우며 복수를 계획하는 격정적인 남성의 마음을 그린 곡이다. 그러한 남성의 심리를 사운드의 마디마디가 잘 표현하고 있다.
< Black Mountian Side >는 지미 페에지의 독특한 분위기를 가진 기타 워크가 삽입되고 있다.
< Dazed And Confused >는 이 그룹의 가장 오래된 레퍼터리라고도 할 수 있다.
야드버즈 시절부터 자주 연주해온 이 곡은 제플린의 뿌리를 말해주는 넘버이기도 하다. 묵직한 베이스의 사운드로 시작되는 이 곡은 간주에서 들려주는 로버트의 보컬이 인상적이고 지미가 바이일린 연주를 들려준다. 그리고 존 보넴의 드럼과 존 폴 존스의 베이스가 다시 연결되어 테마를 연주하고 끝부분으로 연결되어 곡을 깨끗하고 시원스럽게 매듭 짓고 있다.
이 앨범은 처음 등장하자마자 아메리카 차트 98위를 기록했고 그 뒤 6개월 동안은 계속 상승 최고 5위까지 마크했다.
블루스와 하드록 그리고 누구에게나 다정한 사운드를 하나로 결합시킨 이 앨범은 음악적 질의 세련됨에 있어서도 한 그룹의 데뷔를 장식하는데 손색이 없는 것이었으나 하나 재미있는 것은 이 앨범에 대한 평판은 완전히 두 갈래였다는 점이다.
일부 영국의 평론가들은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한데 반해, 일부 미국의 팝뮤직 평론가들은 형편없는 졸작이라고 악담을 퍼부었다.
어떤 평자는 로버트의 보컬이 불쾌하다고 혹평을 하는가 하면, 또 한편에서는 그의 목소리에서 인간의 뿌리를 찾는 신앙의 경지를 엿들을 수 있다고 극찬했다.
레드 제플린의 멤버중 유일하게 이름이 알려져 있던 지미 페이지는 여러곳에서 인터뷰를 요청해 왔는데 지미는 그때마다 존 폴 존스와 존 보넴 그리고 로버트를 치켜세웠고, 자기는 레드 제플린의 멤버 중 4분의 1밖에 안된다고 겸손했다.

  • 대규모 콘서트 출연

첫 앨범을 완성한 뒤 로버트는 자기 목청의 노래 폭을 넓혀가는데에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영화 'Supper Show'의 촬영이 진행된 것도 이즈음이었는데 이 영화에서 제플린은 < Dazed And Confused >를 연주하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이때 문제가 하나 생겼다. 일이 안되려고 촬영을 해야될 때에 로버트는 심한 편도선염이 걸린 것이었다. 그러나 그 이유 때문에 연기할 수도 없어 그대로 촬영은 강행되어 로버트로서는 무척 불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미국에서의 첫 투어가 끝난 뒤, 제플린은 4월에 2번째 투어에 나섰다. 이때의 출연료는 첫 연주여행 때보다 4배로 겅충 올라 있었고 공연장의 규모는 10배 이상으로 확대되어 있었다. 더우기 이번에는 그 어느 연주에서도 입장권은 판매를 시작하자마자 날개 돋힌듯 팔려 매진되곤 했다.
두번째 투어에서는 첫 앨범에 수록된 대부분의 곡을 많이 연주했는데 청중의 반응은 대단히 좋았다. 앨범에 수록된 곡을 재탕함에도 인기가 좋았던 이유의 하나는 로버트의 보컬이 보여준 압도적인 박력이라고 할 수 있다. 제플린의 스테이지는 로버트와 지미의 보컬과 기타의 상승적인 효과가 그대로 관중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존 폴 존스의 음악적 재능과 높은 감각도 뛰어났으나 자기는 뒤에서 등을 밀어주는 숨은 일군으로 만족하고 있어 제플린의 음악성을 더욱 높이는 결과가 되었다.
존 보넴은 철저히 계산된 드러밍을 함으로써 위엄과 자심감을 보여 주었다.
제플린의 무대 공연을 본다는 것은 그야말로 인생에 있어서 커다란 경험과 교훈을 주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사운드는 스튜디오 뮤지션이 일찌기 보여주지 못한 다이나믹한 것이었다.
그리고 무대에 선 레드 제플린이 소울풍 넘치는 연주를 했을 때 40년대 시카고의 블루스를 연상시키는 분위기마저 감돌았다. 이러한 것이 제플린으로 하여금 미국에서의 성공을 하게끔 한 원동력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미국 순회공연에서의 대성공은 제플린 멤버는 몰른 주위의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너무나 갑작스럽고 예상외의 성공이어서 도무지 실감이 나질 않았다. 그래서 제플린은 더욱 노력하고 겸손한 자세를 지켰다. 블루스를 연주할 때면 청중들의 마음속을 파고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지미의 야드버즈 시절의 기타 솔로 넘버인 < White Summer >는 간혹 제플린 연주로 들리곤 했는데 청중의 반응은 몹시 좋았다. 방금 전까지 하드록이 나오다가 갑자기 투명하고 맑은 멜로디가 흘러 나오면 청중은 "동과 정"의 콘트래스트에 충격을 받은듯 했고, 그저 감격을 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다시 소리의 도도한 홍수가 흐르면 그때는 다시 상기된 감격을 얻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레드 제플린의 연주는 모두가 감격적인 것이었다.
이 해 6월 제플린은 BBC라디오 방송의 콘서트 프로그램에 3회나 연거푸 출연했는데 이렇듯 한 달 동안에 세 번이나 한 밴드가 출연한 예는 일찌기 없었다 6월 16일 'The David Simmons Theatre'출연해서 한 시간의 특집 프로로 출연한 제플린은 'Top Gear'에 또 출연을 했다. 뒤이어 6월 27일에는 'Play House Theatre'에 출연을 했는데 이것은 라이브였고, 제플린을 위한 특별 편성의 와이드 프로그램이었다.
이 프로에서 연주한 곡 가운데는 이들이 스테이지에서 즐겨 연주해온 Robert Johnson의 블루스 넘버인 < Traveling Riverside Blues >도 포함되있었다.
그런데 이곡은 유감스럽게도 제플린의 어느 앨범에도 수록되있질 않다.
방송국에서 그 당시의 녹음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면 무척 소중한 연주 기록으로 남을 것이다.
그 다음 날인 6월 28일에는 'Festival of Blues and progresive Music'에 출연, 수천명의 "언더그라운드 뮤직 팬"들 앞에서 열연했다. 그때 참가한 신문과 잡지의 팝뮤직 평론가들은 별로 크게 평하지는 않았지만 관중들은 그 어느 그룹보다도 제플린의 존재를 높이 칭찬했고 박수를 보냈다. 그리고 그 다음날인 6월 29일 제플린은 드디어 영국에서도 대성공을 거두는 승리의 환성을 지르게 되었다. 런던의 로열 앨버트 극장에서 열린 'Pop Prompt'의 첫날에 출연한 이들은 압도적인 찬사를 받은 것이다. 'New Musical Express'지의 어느 기자는 '제플린은 엄청난 갈채를 받았는데 그런 환호성을 받고도 남을 연주를 보여줬다'고 하면서 레드 제플린이야말로 불과 몇달안에 세계를 정복한 신화를 창조했다고 보도했다.
로열 앨버트극장에서의 공연은 그야말로 제플린이 세계정상에 오르는 명연주회였다. 관중들의 앵콜에 응답해서 앵콜 연주를 마친 뒤 무대는 불이 꺼졌는데 그때 시간이 밤 11시가 지나서였다. 그런데 또다시 제플린은 무대에 등장, 연주를 시작했다. 관중들은 모두 무대로 올라와 연주자들을 얼싸안고 그야말로 감격의 하룻밤이 되었다. 이제 제플린은 젊은이뿐 아니라 모든 음악 팬들의 우상이 되고 있었다.
7월에 접어들어서 제플린은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Jethro Tull과 함께 미국 전역 투어를 했다. 이들의 뉴욕 공연에서는 정원 1만 명의 공연장에 2만 1천명의 관중이 몰려와서 일대 수라장이 되기도 했다. 이래서 입장못하고 되돌아간 관중들은 뉴욕에서의 공연을 하루 더 연장해 달라고 했으나 워낙 꽉 짜여진 스케쥴이어서 그러한 팬들의 요구를 받아주지 못했다.
제플린의 인기가 이렇듯 날로 상승하자 레코드의 판매 실적도 기하 급수로 늘어갔다. 첫 앨범이 1백만장을 돌파, 골드 디스크를 받았고 첫앨범뿐 아니라 2호 앨범도 날개가 돋쳤다. 2호 앨범이 나오기도 전에 에약이 쇄도한 것인데 그 예약주문은 무려 35만장에 달했다. 이러한 방대한 분량의 예약 주문은 전대미문의 기록이었다.

  • 영국에서도 인기상승

레드 제플린의 멤버들은 숨돌릴 틈이 없는 바쁜 일정속에서도 두번째 앨범에 대한 구상을 시작했다.
런던과 벵쿠버, 뉴욕 등에서 연주하는 도중 새 앨범에 대한 연주 연습을 했고 곡을 만드는 작업은 심야에 호텔방에서 했다.
10월 12일. 제플린은 런던의 The Riseum에서 공연을 가졌다. 당시 떠돈 풍문에 의하면 그 때 제플린에게 지불한 출연료는 천문학적인 액수였고 그 때까지 그 어느 그룹에 지불했던 것보다도 비싼 출연료라고 했다.
이 콘서트에서 제플린은 새로운 곡을 여러개 선보였는데 새 곡에 대한 청중의 반응은 아주 좋았다. 참석했던 평론가들도 모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같은 해 10월, 제플린은 미국으로 건너가서 유명한 카네기홀에서 콘서트를 열었다. 미국에서의 제플린은 이미 수퍼스타의 위치를 굳힌 것이나 다를바 없었다. 연주회에 대한 관중의 반응은 생각했던 대로 열광적인 것이었고 광적인 팬들 때문에 객석은 광란의 도가니가 되었다. 30분이 넘는 존 보넴의 드럼 솔로가 끝나자 관중은 아우성을 쳤고 그 아우성은 5분 이상을 지속했다. 그로 인해 연주가 중단됨은 물론이다.
레드 제플린의 두번째 앨범인 'Led Zepplin 2'는 12월에 판매되기 시작했는데 수록곡은 모두 9곡. ( Atlantic / 40037 )

Side 1

  • Whole Lotta Love

  • What Is And What Should Never Be

  • The Lemmon Song

  • Thank You

Side 2

  • Heartbreaker

  • Living Loving Maid(She's Just A Woman )

  • Ramble On

  • Moby Dick

  • Bring It On Home

앨범에는 여러가지 아이디어가 넘치고 있었다.
< Mobu Dick >에서는 존 보넴의 드럼 솔로가, < Ramble On >에서는 로버트가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시의 세계가, 블루스의 분위기가 넘치는 < Bring It On Home >에서는 기발한 녹음의 아이디어가 빛났다. < Thank You >에서는 제플린의 전 멤버의 기량이 고루 활용되었고 < Lemon Song >에서는 아주 얌전하고 감미로운 블루스 넘버라는 평을 받았다.
이 앨범에서는 존 보넴과 존 폴 존스가 제1호 앨범 때보다 더 정열을 쏟았고 더 많은 애정을 투입했다. 그랬기 때문에 그룹의 음악적 스타일은 훨씬 깊이를 더했고 심오한 경지의 연주가 되었다.
12월 11일, 이 날 제플린이 영국 정부로부터 두번째로 플래티넘 디스크를 받았고 동시에 골드 디스크 한장을 또 받았다. 제플린이 미국에서 5백만 달러 상당의 레코드를 팔아서 결과적으로는 영국 국고 수입에 큰 공헌을 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수여식은 런던에 있는 사보이 호텔에서 있었는데 이 자리에는 영국의 상공부차관이 참석, 플래티넘 디스크와 골드 디스크를 수여했다.
새로운 앨범은 미국과 영국은 물론 구라파 여러 나라에서 차트 1위를 마크했다.
미국의 어틀랜틱 레코드에서는 < Whole Lotta Love >를 싱글판으로 내놓았는데 이것 역시 싱글차트 1위를 차지했다. 제플린의 디스크는 무엇이든 어디서든 날개 돋힌듯 팔려나갔다.
이러한 미국에서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제플린은 영국에서는 싱글을 내놓지 않았다. 그 이유는 싱글판으로 내놓을 이렇다할 곡이 없었기 때문이다. 앨범에서 한 곡 뽑아서 내자는 레코드 회사의 간청이 있었지만 앨범의 것을 그대로 뽑아 싱글을 내놓는 것은 창피하고 치사한 행위라고 제플린 멤버 모두는 사절했다.

  • 비틀즈를 앞지르자 !

존 폴은 베이스뿐 아니라 하몬드 올갠까지 스테이지에서 사용할 수가 있었다. 이 하몬드 올갠을 사용하면 그 음악적 효과는 대단해서 레드 제플린의 새로운 음악적 측면을 보여주는 커다란 수확이 되었다.
1970년 초에 영국 투어를 시작했는데 이 투어에서 그의 하몬드 올갠 실력은 유감없이 발휘 되었다.
2월에 접어들면서 레드 제플린의 일정은 더 바빠졌다. 다시 해외 투어를 시작한 것이다. 이 연주여행에서 몇가지 해프닝이 있었는데 동남아의 싱가폴 공연에서는 장발 금지라는 싱가폴 정부정책에 따라 모처럼 예정되었던 공연이 중지되었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는 격으로 레드 제플린은 이 기회를 이용, 좀 쉬면서 그 동안에 밀린 일들을 처리했다. 제플린은 급거 봄베이로 가서 휴양도 취하면서 녹음 취입을 했다. 우연한 기회로 레코딩을 마칠수 있었던 제플린은 호주로 향했다.
호주에서 공연을 마치고 2월 21일에는 다시 구라파로 돌아와 덴마크의 코펜하겐에서 공연을 하는데 이 코펜하겐 공연에서 제플린은 제플린이 아니라 'The Knobs'라는 그룹 이름으로 출연했다. 이름을 바꾸어야만 했던 이유는 덴마크의 Eva Fon Zeppelin 백작부인이 자기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고 노발대발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적당한 이름을 붙인 것이었다.
구라파 연주여행의 최종 스케쥴을 마친 제플린은 스위스에서 열리는 재즈 훼스티발에 참가하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1개월 간의 투어를 했다.
미국에서의 투어는 그야말로 강행군의 연속이었으나 멤버들은 조금도 지치지 않았다. 제플린 멤버들은 어쩌면 강철로 만든 인간으로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강인했다.
이 미국 순회공연에서도 관객은 가는 곳마다 넘쳤다. 제플린의 인기는 하루가 다르게 치솟고 있었다.
이즈음 미국의 어느 영화사로부터 도큐멘터리 영화를 만들자는 제의를 받았으나 아직 시기상조라 해서 사양했다. 또 가는 곳마다 TV국으로부터 출연교섭이 쇄도했다. 그러나 제플린은 단 한번도 TV에 출연하지 않았다. TV 브라운관의 제한된 화면과 TV 스피커의 한정된 음량, 그리고 TV 출연의 제한된 시간으로는 제플린의 음악을 충분히 재현할 수 없다는 것이 TV 출연의 교섭 거절의 이유였다. 이 때 일부에서는 제플린이 너무 거드름핀다고 비난도 했으나 제플린의 진심은 허세나 거만을 떠는 것이 아니었다. 제플린이 TV에 출연해서 연주를 하지 않은 대신 멤버들은 개인적으로 TV에 출연해서 얘기를 나누곤 했다.
예를 들면 지미 페이지가 영국 BBC-TV에 출연을 한 적이 있는데 페이지는 대담 프로의 초대 손님으로 출연 어쿠스틱 기타로 여흥삼아 < Black Mouatain Side >를 연주했다. 이 정도가 TV에 선보인 제플린의 전부였다.
미국에서 제플린의 인기는 전성기이 비틀즈 인기를 훨씬 앞지르는 것이었다.
더우기 제플린의 인기는 그것이 정상에 달한 것이 아니라 지금 정상을 향해 출발하는 단계에 있었다. 실제로 이해 9월에 실시된 내셔널 팝스 폴스 (polls : 인기 투표)에서 제플린은 영국 부문과 국외부분 2분문에서 오랫동안 군림해온 비틀즈를 제치고 1위로 껑충 뛰어 올랐다. 또 각 멤버도 Melody Maker지의 인기투표에서 연주 악기별 랭킹의 수위를 차지했다. 이제 제플린은 매스미디어가 주시하는 존재가 됬고 영국 매스컴으로부터 Heavy Rocks상을 받았다. 제플린의 위치는 흔들리지 않는 수퍼스타였다.
Disk지의 브리티쉬 앨범 차트에서 앨범 'Led Zepplin 2'가 제1위로 오른 것은 이 해가 거의 저물어 가는 12월이었다.
한편 Melody Maker에서는 제플린의 모습을 표지등 최고의 지면에 실어 그 영광을 실감나게 해주었다.
10월 16일 제플린은 다시 영국 상공부로부터 표창을 받았다. 두번째로 나온 앨범이 유럽에서 많이 팔렸고 또 싱글판인 < Whole Lotta Love >가 미국에서 백만장 이상 팔린 것에 대한 표창으로 골든 디스크 2장이 증정된 것이다. 존 보넴 등 3인이 참석한 수여식에서 영국의 정부차관 Anthony Grant씨는 다음과 같이 치사를 했다.
'정부는 팝 그룹에 대한 명예와 권위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읍니다. 다른 수출 업종과 함께 레드 제플린은 영국경제에 큰 도움을 주는 중요한 존재입니다. 그런 뜻에서 앞으로도 계속 노력하고 분투해주길 바랍니다.'
6월에 접어들면서 아이슬랜드에서 몇차례 공연을 가졌다. 그리고 나서 또 다시 미국 순회공연을 떠났는데 미국 순회공연의 마지막 스케쥴인 보스턴과 예일에서의 일정을 취소하고 돌연 영국으로 돌아왔다. 6월 28일에 열리는 1970년 버스 훼스티발에 참가하기 위해서 였다. 그런데 두군데에서 열리기로 했던 공연을 취소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계약금의 수십배를 배상해야 되기 때문이다. 이때 제플린이 계약 위반 배상금으로 내놓은 돈이 20만 달러 였는데 이런 큰 돈을 손해보면서까지 취소한 것은 영국에 있는 모국의 팬들을 의식한 때문이었다. 영국에서의 훼스티벌 에서는 앵콜 때문에 다섯번이나 연주를 할 정도로 큰 환영을 받았다. 이 앵콜에서 제플린은 초기의 스테이지를 연상케 되는 흘러간 로큰롤 넘버들을 연주했다.
7월에는 독일 전역을 도는 투어를 했고 8월에는 다시 미국으로 향했다.

  • 세번째 앨범

이 해 미국에서 춘계 투어를 마친 뒤 제플린은 스노우 도니어에 있는 작은 오막집에서 지낸 적이 있다. 다 찌그러져가는 이 작은 오막집은 훼일즈 지방의 분위기를 나타내주는 주인없는 빈 집이었는데 이 집에서 제플린은 세번째 앨범을 구상했다.
이 자그마한 오두막집에서 생활하면서 멤버들은 풍부한 아이디어와 악상을 찾아내서 세번재 앨범의 구상을 끝냈다.
5월이 되어 레코딩 스튜디오에 들어선 제플린은 모두 10곡으로 된 앨범 제작에 착수했다. 녹음된 10곡 가운데에는 예전엔 볼 수 없었던 팁, 새로운 감각의 곡이 있는가 하면 새로운 음악적 방향을 타개한 뛰어난 것도 있었다.
10월에 판매되자 팬들의 반응은 여러 갈래로 나타났다. 수록된 곡을 보면 앞뒷면에 모두 5곡씩 들어 있었다.
Side 1

  • Immigrant Song

  • Friends

  • Celebration Day

  • Since I've Been Loving You

  • Out On The Tiles

Side 2

  • Gallows Pole

  • Tangerine

  • That's The Way

  • Born-Y-Aur Stomp

  • Hats Off To (Roy) Harper

< That's The Way >와 < Tangerine >에 나타난 목가적이며 서정적인 분위기는 그룹의 음악성이 변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뚜렷한 증거라고 말할 수 있다.
< Friends >도 그런 의미를 시사하는 곡인데 비교적 전기적인 분위기가 강조 되고 있다.
슬픔에 잠긴 보컬과 듣는이로 하여금 감상적인 분위기로 빠뜨리는 기타 프레이즈의 < Since I've Been Loving You >에서는 로버트의 보컬 영역이 크게 발휘되고 있다. 저음이면서 깊이를 지녔던 지금까지의 목소리에서 하늘을 찌를듯한 자습견용 투명하고 강한 목소리로 변화한 것이다.
< Gallows Pole >은 리드 베리의 오울드 넘버인데 고통이 넘치는 보컬과 세련된 드러밍이 인상적이다.
< Born-Y-Aur Stomp >는 로버트의 음악적 소양이 충분히 발휘된 곡으로 존 폴 존스가 5현 베이스와 어쿠스틱 기타를 담당했고 로버트의 시 등이 새로운 감각을 연출하고 있다.
바이킹의 침략을 테마로 한 것이 < Immigrant Song >으로 오프닝은 로버트의 절규로 시작된다.
< Celebration Day >와 < Out On The Tiles >의 2곡은 존 보넴의 격렬한 매력을 돋보이도록 한 것이다. 그의 본능적 이라고 할 수 있는 자발성과 즉시성이 풍부하게 전개되고 있다.
이 앨범은 어느 나라의 앨범 차트에서도 1위로 부상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한동안 다른 앨범이 따라 오질 못했는데 그럴즈음 제플린이 극동지방으로 투어를 떠났다.

  • 네번째 앨범의 탄생

극동지방 투어에서 돌아온 제플린은 네번째 앨범 제작에 들어갔다. 앨범 기획에 몇주일을 보낸 뒤 제플린은 또 다시 투어를 떠났는데 이번 투어는 흔히 있는 그런 투어와는 성격이 크게 달랐다. 조그마한 클럽 등 제플린이 연주하기로 한 연주장의 규모는 너무나 작은, 이른바 3류 그룹의 연주장 그것이었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제플린은 새로 구상한 앨범에 대한 청중의 반응을 보다 싸구려 콘서트를 통해서 알아보자는 계산 때문이었다. 콘서트의 입장료는 파격적으로 싸게 매겼다. 그럼으로써 일반 대중이 제플린의 음악을 어떻게 알고 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그렇게도 용의주도하게 계획된 이번의 콘서트에는 하나의 커다란 맹점이 있었다. 입장료의 값이 싸건 안싸건 연주하는 장소가 구질구질하든 않든 몰려오는 관중의 인원은 더욱 늘어만 갔다. 그래서 연주장마다 사람이 터지게 몰려와서 일대 혼란이 벌어졌고 밟히고 밟는 예기치 않은 사고가 연발한 것이다.
그럼에도 제플린은 3월에서 4월에 걸쳐 크고 작은 연주회를 계속했다. 크게는 호화판의 연주로 런던의 Marquee에서부터 Dublin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지역을 커버했고 연주 곡목 역시 지금가지 보여준 풍부한 레퍼터리 외에 < Stairway To Heaven >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 Stairway To Heaven >은 제플린이 의욕적으로 내놓은 신곡이었다. 제플린의 스테이지에서는 너무나 밀린 관중끼리 일대 난투극이 벌어졌는데, 그 난투극은 제플린의 연주에 황홀해진 관중이 얼떨결에 벌인 넌센스의 드라마였다. 그만큼 제플린은 많은 화제를 불러 일으킨 그룹이었다.
이러한 흥분된 나날을 보내면서도 제플린은 또다시 새로운 앨범을 준비하는데 게으르지 않았다. 한쪽에서는 너무도 투어가 많다는 자성론이 일어났다.
투어라는 돈벌이에 너무 빠지다보면 새로운 앨범 즉 그룹의 생명격인 창작 작업이 지연되는게 아니냐하는 반성의 소리였다.
이해 7월 제플린이 유럽 투어에 나섰을 때 정말로 뜻하지 않은 최악의 사태가 생겼다.
밀라노의 Vigorelli 스타디움에 운집한 1만 5천 명의 팬들이 제플린 연주에 열광하고 있는 그곳에 군대와 경찰이 들어와 연주회장은 순식간에 수라장이 된 것이다.
일부 흥분한 팬들의 과격했던 행동이 예기치 않았던 사태까지 몰고 온 것이었다.
연주회장의 객석에서 혼란이 있다쳐도 제플린 멤버들은 그대로 연주를 강행하려고 했다. 소요가 있든 말든 연주는 계속되었는데 그 연주가 더 계속 될 수 없는 사태에 이르게 되었다. 경찰이 발포한 최류탄의 가스가 연주 무대까지 퍼져와 도무지 서있을 수 없는 최악의 사태가 된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멤버들은 악기를 놔둔채 무대 뒤로 피신하고 말았다.
유럽 투어를 마친 뒤 제플린은 또 다시 미국 투어에 들어갔다. 미국에서의 이들의 인기는 더욱 더 높아져서 이제는 1만 2천 명 이상을 수용하는 연주장이 아니고는 공연을 할 수 없었다. 몰려오는 관객을 되돌려 보낼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춘계 영국 투어를 마친 뒤 한동안 발길이 뜸했던 제플린은 11월에 접어들면서 대대적인 국내 공연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 공연 중에서도 특히 런던에서의 공연은 영국에서는 가장 큰 규모로 꾸밀 예정이었다.
피터 그랜트와 버팔로 뮤직의 리키 파에 의해 기획된 "Electric Magic"이라 명명된 이 콘서트는 써커스의 둥물들을 스테이지에 등장시키는 등 색다른 아이디어가 반짝이고 있었다. 이 연주회는 네번째로 나오는 앨범의 출반과 때를 같이 했다. 알고 보면 네번째 앨범의 프로모션을 겸한 공연이기도 했다.
그런데 앨범이 나오자 또 하나의 화제거리가 되었다. 어떻게 된 앨범이 재킷에는 앨범의 타이들이 쓰여 있지 않을 뿐 아니라 그룹의 이름까지도 기재되어 있질 않았다. 음악 전문지에는 어쩔 수 없이 멤버 한 사람, 한 사람을 상징하는 심벌 마크를 앨범의 타이틀 대신 썼다.
그 네개의 심벌 마크는 Island의 고대 'Loon' 문자라고 예측을 했었는데 팬들의 이러한 예측은 완전히 빗나갔다. 4개의 마크는 어떤 원전이 있어 따온 것이 아니라 멤버 각자가 자기 뜻대로 제 것들을 도안한 것임이 밝혀졌다.
8곡에 수록된 내용.
Side 1

  • Black Dog

  • Rock And Roll

  • The Battle of Evermore

  • Stairway To Heaven

Side 2

  • Misty Mountain Hop

  • Four Sticks

  • Going To California

  • When the Levee Breaks

이 앨범에서 우선 눈에 띄는 것은 뭐니뭐니 해도 < Stairway To Heaven >이다.
노랫말을 적은 카드가 들어있는 것부터가 특이했고 아주 느린 템포의 오프닝이 어쿠스틱 기타로 되있는 것도 새로운 감각을 불러 일으킨다. 그야말로 감미로운 밸러드의 곡이 < Stairway To Heaven >인 것이다. 곡의 중반에서 기타와 드럼, 그리고 정확한 리듬으로 삽입되는 베이스가 창출해 내는 수정과도 같은 분위기는 뒤이어 펼쳐지는 드라마틱한 변조로 더욱 고조되고 엔딩으로 연결된다.
찢는 듯한 드럼으로 시작되는 < Black Dog >은 하드록 취향의 곡으로 지미와 폴과 보냄이 정열을 기울여 연주하고 있다. 로버트의 보컬도 하드록의 보컬을 유감없이 발휘했고 그의 에너지가 무한함을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다.
< Roak And Roll >도 타이틀 그대로 생동감이 100% 넘치는 곡이다. 눈을 감고 들으면 스테이지의 모습을 그대로 연상시킬 만큼 박력과 정열이 넘친다.
Sandy Denny를 게스트로 초대한 < The Battle of Evermore >는 로버트와 샌디가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목청을 돋구는 곡이다. 스코틀랜드의 암흑 시대를 소재로 한 포크송인데 두 사람의 보컬 배경으로는 물위에 떠있는 기타의 음향이 젖어든다.
< Misty Mountain Hop >은 리드미컬한 빠른 템포의 곡으로 공원을 산책할 때 만난 히피들의 모습을 희학적으로 그린 곡이다. 올갠과 기타의 컴비네이션이 아주 아름답다.
< Four Sticks >는 존 보넴의 실력을 보여주는 곡으로 여기서도 그는 야성미와 지성미를 함께 보여준다.
< Going to California >는 머리에 꽃을 꽂은 소녀를 노래한 로멘틱한 넘버로 시종일관 델리게이트한 기타 플레이가 보컬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런데 다른 곡과 취향을 크게 달리하는 곡이 있다. 그것이 바로 < When Levee Breaks >이다. 1920년대의 Memphis Mini Blues를 편곡한 것으로 하늘을 찌를 듯한 드럼과 슬라이드 기타 그리고 듣는이로 하여금 황홀경으로 이끌어 가는 보컬이 이 곡의 압권이라 하겠다.
결론적으로 이 앨범은 상상력이 풍부한 음악성과 잘 순화된 야성의 매력을 겸하고 있다.

  • 세계 투어

1972년 2월 제플린은 다시 스테이지의 활동을 개시했다.
뉴질랜드 연주여행을 마친 이들은 거기서 얼마 멀지 않은 호주로 갔다. 호주에서 2회의 공연을 했는데 호주의 관중 역시 제플린에게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시드니와 오클랜드에서는 야외 공연을 했는데 각각 2만 5천 명 이상의 청중이 몰려 왔다. 이로써 또 하나의 기록을 세운 셈이 되었다. 호주에서는 일찌기 그토록 많은 청중이 모인 예가 없었던 것이다.
호주에 체재하고 있는 동안 제플린은 호주의 WEA 사장 Paul Turner씨로부터 4장의 골드 디스크를 받았다.
이 해에 'The New Age Of Atlantic'이라 이름 붙인 앨범이 판매되었는데 이 앨범 속에는 제플린의 곡도 하나 들어 있다. 여기에 수록된 곡은 'Hey! Hey! What can I Do'라는 제목의 노래로 내용은 별로 행실이 좋지 않으며 솔직하지 못한 여성에 대해 노래한 것이다. 그런데 이 곡은 제플린이 발매한 앨범에는 들어있지 않았다.
6월에서 7월에 걸쳐 제플린은 미국 투어를 했다. 물론 관객 동원은 예전과 같았으나 신문 잡지에서는 같은 시기에 투어를 하고 있던 롤링 스톤즈쪽에 더 비중을 두고 보도하는듯 했다. 롤링 스톤즈의 연주 소식은 연주회 관계 지면에 나올뿐 아니라 전미국을 커버하는 사회면에도 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에 대해서 제플린은 거의 개의치 않았다. 그들이 신경을 쓰고있는 것은 오직 영국의 팬들이었다. 미국에서 활약하고 있는 제플린의 소식이 어떻게 하면 모국의 팬들한테 전해지는가 하는 것이 이들에게는 큰 관심이었다.
이 해 가을, 제플린은 두번째로 일본 연주여행을 했다. 일본에서의 청중의 반응은 1차 방문 연주 때보다 훨씬 격렬한 것이었다. 제플린은 동서양을 모두 석권하고 있음을 보여준 결과가 되었다.
11월에는 스위스의 프로모터인 Claude Nobbs씨의 초청으로 스위스 투어를 떠났는데 스위스에서 있은 2번의 연주회에는 유럽에서 몰려온 관중이 다수 참가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몇개월 동안 제플린은 유럽에서 단 1회의 공연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영국내 투어는 11월 30일 New Castle City Hall 콘서트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런던의 Allexander Palace에서 막을 내렸는데 12월 23일 열린 마지막 공연에는 1만 2천명의 관중이 모여들었다. 이 알랙산더 팰리스는 제플린이 한번 공연하고 싶었던 공연장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토록 제플린이 바라던 연주였는데 제플린 멤버들은 입을 모아 불평을 했다. 그 당시 로버트는 난방 시설이 엉터리였다고 했고 또 음향 시설도 4류 홀만 못했다고 보도진에게 말했다.
이 투어에서 제플린은 5번째 앨범을 구상했다. 제플린은 이 투어에서 2년만에 처음으로 < How Many More Times >을 연주했다. 여느 그룹 같았으면 가는 곳마다 거의 똑같은 레퍼터리로 계속 연주하는 편이나 제플린은 그렇지 않았다. "관중이 지루해 할 것 같아서 펜들이 극성으로 요청하지 않는한 지난 날의 것은 연주하지 않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 새로운 음악성의 창안

3월이 다 갈 무렵에야 겨우 새로운 앨범이 판매되었다. 보통 같았으면 영국내 투어를 하는 동안 출반해서 선전도 겸해야 되는 것이었으나 타이밍이 맞지 않았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앨범의 타이틀은 'House of The Holy'였다. 앨범의 재킷에는 많은 블론드 여성들이 채색된 바위산을 오르는 장면이 묘사되었는데 디자인은 제플린의 멤버 전원과 디자이너 집단인 Hypnosis의 포오와 스톰 등이 힘을 합쳐 만들었다.
히프노시스는 그 당시 록계의 굵직한 앨범은 거의 도맡아서 재킷을 디자인 해오고 있었다.
이 앨범에서도 역시 그룹 이름이나 멤버의 이름은 단 한자도 기입되지 않았다.
이름이나 그룹 명칭 외에 제플린의 심벌 마크가 기입되었는데 예의 심벌 마크 네개는 이미 제플린의 등록 상표처럼 되어 있었다.
수록된 곡은 모두 8곡이었다.
Side 1

  • The Song Remains The Same

  • The Rain Song

  • Over The Hills And Far Away

  • The Crunge

Side 2

  • Dancing Days

  • D'yer Maker

  • No Quarter

  • The Ocean

< D'yer Maker>는 정감 넘치는 곡으로 미국내에서는 싱글 커트된 곡이다. 어쩌면 앨범 'House of the Holy'중에서 가장 뛰어난 곡이라고도 할 수 있겠 는데 제목의 뜻은 (그 여자 마음을 휘어 잡았어?)하는 뜻이 된다. 이러한 묘한 제목 이어서 그 당시 미국의 젊은이들은 이 말을 유행어로 쓸 정도였다.
< The Crunge >도 새로운 음악적 시도가 풍기는 곡이다. 제임스 브라운의 곡을 바탕으로 로버트와 지미가 감탄하리 만큼 매력있게 보컬과 기타로 엮어가고 있다.
< No Quarter >는 듣는이로 하여금 어딘가 예감을 주게하는 곡인데 그 예감이 몹시도 영감적이고 암시적이다. 로버트의 보컬은 때때로 휠터가 걸리지 않았나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울림이 심하다. 스테이지에서 연주될 때는 존 폴의 재즈, R & B 그리고 클래식에 이르는 모든 음악 형태를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백킹 보컬로 참가하는 < The Ocean >은 저도 모르게 발장구를 치게 되는 경쾌한 넘버로 제플린의 단골팬을 위해 만든 것이라고 한다.
< The Rain Song >과 < The Song Remains The Same >은 차곡차곡 노래가 쌓여가면서 웅장한 엔딩으로 고조되는 독특한 분위기의 넘버다. 그야말로 복잡한 곡 구성의 특징을 갖는데 이러한 기법은 제플린의 곡으로는 그다지 흔하질 않다.
< The Rain Song >에서는 멜로트론이 사용되고 존 보넴의 공(gong)사용이 상당한 효과를 내주고 있다. 지미의 12줄 기타는 때로 목가적인 분위기마저 자아내게 하는데 로버트는 이러한 분위기가 어울리게 노래를 한다.
< The Song Remains The Same >은 더블 네크 기타의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살린 지미의 저력이 돋보이는 걸작이 아닐 수 없다. 아마도 멀티 트랙 녹음 탓인지 곡 전체를 통해 서서히 고조되어 가는 긴장감과 박력은 그야말로 전율의 경지로 몰고간다.
< Dancing Days >는 8곡 가운데 가장 설명하기 어려운 곡이라고 할 수 있다.
뭐라고 할까, 50년대의 추억의 멜로디를 들으며 술잔을 기울였으면 하는 그런 분위기의 곡이다.
기사가 인쇄된 카드를 붙여 판매한 'House Of The Holy'는 유럽을 비롯 대부분 나라에서 톱 챠트를 기록한 앨범이기도 하다.

  • 기록을 깨뜨린 관객동원

뒤이어 시작된 33개 도시를 누빈 전미 투어는 제플린에게 있어서는 생애를 통해 잊을 수 없는 연주여행이 되었다. 이 투어에서 제플린은 텍사스의 스테이지에서 최고의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쇼코우의 역할은 제플린 콘서트의 음악적 크라이맥스를 시각적인 면에서 연출하는 것이었다. 오버 헤드 플로우 스포트(머리위에서 내리쬐는 조명)나 그 밖에 더욱 효과적인 시각적 장면을 연출하도록 아주 세심한 면가지 신경을 쓰게 되었다. 이러한 연출효과는 관객의 마음을 휘어 잡았고 제플린의 콘서트에서도 초일류급이었다. 어디서 콘서트를 열 예정이면 2일이나 3일전에 무대 관객 스텝들이 현장에 출장해서 보다 효과를 올리는 무대 시설 작업을 했다.
보통 연주회에서 쓰는 무대시설 투자가 1이라면 제플린은 연주장을 꾸미는 데에는 40정도 투자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니까 세트 디자인 및 자체에 40배를 투자하는 것인데 실제로 관객에게 주는 효과는 그 이상이었다.
미국 연주여행에서 첫 공연장은 어틀랜타 스타디움이었다. 4만 관중이 모인 쇼의 스테이지는 문자 그대로 휘황찬란 했다. 호화 스테이지는 제플린의 연주를 보다 돋보이게 하는 효과를 100% 발휘했다.
연주여행에서 보여주는 제플린의 멤버의 교통 수단도 지금까지의 그것과는 크게 달라져서 주목을 끌었다. Boeing사에서 만든 보잉-72OB형 제트 여객기를 개조, 제플린의 자가용 비행기로 만든 것이다. 독특한 색으로 칠한 제플린의 자가용 비행기는 'Starship One'이라 명명했다. 원래는 138명이 탈 수 있는것을 개조를 한 'Starship One'은 제플린 멤버와 스텝 40명이 탈 수 있었다. 침실과 식당과 샤워 룸과 클럽 룸과 당구장까지 설치한 초호화 여객기였고 연습용 스테이지에는 각종 비디오 시설과 전자올갠까지 설치해 놓고 있었다.
제플린의 사운드는 어디서 오는 것이며 누구의 영향을 받는 것일까?이러한 의문에 대해 로버트는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들은 주변에 있는 것이면 그 무엇에든 흥미를 갖는다. 특히 소리에 대해서는 항상 호기심과 애정을 가지고 귀를 기울이며 이를 분석하고 평가해본다. 우리 사운드는 결국 우주의 모든 음향을 집약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연주여행 도중 잠시 시간을 낸 멤버들은 영국으로 돌아가 가족과 함께 지냈다.
휴가에서 돌아온 5월 5일 Tamper 스타디움에서 콘서트를 가졌다. 바로 여기에서 세계 기록이 수립되었다. 관객 동원 수 5만 6천 8백 명, 입장료 매상 30만 9천 달러였다. 이 기록은 1965년 비틀즈가 쉐어 스타디움에서 세운 기록을 가볍게 누른 것으로 기네스 북에 등록되었다.
그즈음 레드 제플린의 기록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이 다시 일기 시작했다.
그러나 제플린의 멤버들은 아직도 시기상조가 아니냐 해서 사양을 했다. 하지만 주위에서의 주장도 물러서지를 않았다. 오랜 논란 끝에 제플린의 멤버도 영화 제작 계획에 찬성을 하게 되었다. 촬영 시기는 7월 뉴욕의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리는 연주회의 세번째 콘서트를 찍기로 했다. 영화 제작 스케쥴을 짜면서 스탭도 편성했다.
영화 촬영 게획은 순조로이 진행되어서 예정되었던 공연 실황과 관중들의 열광하는 모습을 유감없이 필름에 수록할 수가 있었다.
이 촬영을 마고 자축하는 파티석상에서 'House of The Holy'의 골드 디스크 상을 어틀랜틱 레코드사 사장으로부터 전해받았다.
그 뒤 영국으로 돌아온 제플린은 그동안의 피로를 풀면서 영화 제작에 따르는 밀린 작업들을 했다.
그동안 사양해 오던 영화 제작이었지만 막상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자, 멤버들은 보다 좋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영화 촬영은 공연 현장의 필름외에도 개인적인 기량을 보여주는 장면을 별도로 찍어 삽입해야 된다. 그러기 위해서 멤버 개개인의 연주 장면을 촬영해야 되는데 존 보넴의 촬영은 Santana Ford의 경기장에서 있었다.
로버트의 씬은 웨일즈 지방의 시골에서 촬영했다. 여기서 로버트는 고전 의상을 입고 말에게 채이고 나뒹굴어지는 장면의 주인공이 되었다.
이때 지미의 개인적인 씬은 촬영하지 못했다. Maggie Bell의 앨범 제작에 찬조 출연하는 일때문에 촬영 스케쥴에 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또 존 폴은 마드레드 벨의 앨범 제작에 찬조 출연했을뿐 아니라 작사, 작곡, 프로듀서, 프로모션까지 겸하고 있어 눈코 뜰 사이가 없었다.
겨울에 접어 들면서 지미는 스코틀랜드에 새로 산 집 '보울시킨'에서 지내기 위해 떠났다. 그 집은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나이라 불려져온 Alister Clawley가 살던 역사적인 옛 가옥인데 여기서 지미는 한겨울 며칠을 지냈다.
그리고 그동안에 촬영하지 못했던 솔로씬의 촬영을 끝냈다.

  • Swan Song 레이블

1월과 2월에 제플린 멤버들은 6번째 앨범을 준비하는 일로 분주히 보냈다.
연습과 녹음의 반복 훈련은 그 어느 앨범 제작 때보다도 바빴는데 6번째 앨범이 이토록 붐볐던 것은 이번이 제플린 최초의 2장짜리 앨범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6번째 앨범에 수록될 곡은 이미 작곡이 완료된 것들이었다. 6번째 앨범을 위해 별도로 작곡을 해놓고 앨범에 수록을 하려다가 그때 그때 제외되었던 30여곡 가운데서 추려 수록하는 것이 6번째 앨범의 특징이었다. 그렇듯 많은 곡 가운데서 또다시 추려야 했기에 선정 작업은 무척 어려웠다.
이러한 작업끝에 새 앨범의 구성 윤곽이 나타났는데 새 앨범의 구성곡을 보면 새로 지은 곡이 반, 그리고 지난 날 작곡해 두었던 것이 반이었다.
2월 14일 지미 페에지, 로버트 플랜트 그리고 존 보넴의 세 사람은 로이 하버에서 열리는 '밸런타인 콘서트'에 출연, 로니 레인, 키스 문, 맥스 미들튼과 함께 '열광적인 스테이지'를 만들었다.
제플린은 매니저인 피터 그랜트, 핑크 플로이드, 카리스마 레코드와 함께 공동 출자의 형식으로 연주 기록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이 영화는 당시 평이 좋았던 어느 TV 코미디 프로를 영화로 만든 것이다.
피터 그랜트와 어메트 아티건 두 사람은 그즈음 제플린의 독자적인 레코드 회사 'Swan Song'을 설립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레코드의 레이블 마크는 윌리엄 라이너의 회화에서 힌트를 얻어 만들었다는데 제플린의 6번째 앨범이요, 2장짜리 앨범으로는 처음이기도 한 앨범에는 '스완 송'의 레이블을 붙여 팔기로 했다.
레코드 회사 설립 취지를 로버트는 이렇게 말했다.
'그동안 우리가 참가했던 레코드 회사들은 우리에게 많은 레코드 팬을 위해 별로 일은 한 것이 없다. 한 마디로 말해서 레코드 회사에서는 막대한 수입을 올리고도 별로 일을 남기지 않은 것이다. 물론 한두 회사는 우리를 위해 수입의 일부를 유용하게 썼으나 그 밖에 레코드 회사들은 오직 자기네 포켓에 챙기기에만 바빴다.
이러한 레코드 회사의 횡포에 불만을 품어온 우리가 직접 회사를 설립하기로 한 것이다.'
스완 송 회사의 설립을 축하하기 위한 파티는 뉴욕과 로스앤젤리스에서 열렸다.
파티에는 어틀랜틱 레코드사와 제플린의 관계자들 그리고 많은 보도진이 모여 크게 성황을 이루었다. 특히 헐리우드에서 열린 파티는 대단해서 유명한 대중 음악 관계자는 거의 모였다.
파티석상에서 제플린은 새로 내놓을 앨범에 대한 소식을 참석자들에게 알렸다.
여기서 제플린은 새로 나올 앨범에서는 제플린이 다시 하드 록으로 복귀하는 모습이 잘 나타나있다고 설명했다.
영국에서의 스완 송 레코드 회사의 창설 기념 파티는 10월 31일 지젤 허스트의 동굴에서 열렸다. 이 축하 파티는 가장 사치스럽고 호화로왔던 파티로 기록되었는데 실크 토피드의 발매 기념을 겸한 것이기도 했다. 동굴 내부는 모두 촛대로 조명을 했고 나온 술도 세계 최고급의 명주만이었다. 참석자들이 최고의 술, 산해 진미의 안주로 얼큰했을 즈음, 동굴 벽스크린 면에는 영화가 투영되어서 참석자들을 더욱 감탄시켰다.

  • 피지컬 그래피티 발간

1월에 접어들면서 제플린은 로텔담의 뷰랏셀에서 워밍업을 겸한 콘서트를 가졌다. 이때 로버트는 TV 인터뷰에 출연, 이 해에 있을 중요한 예정을 발표했다. 그 중 가장 큰 계획은 특별히 영국의 팬을 위해 여름에 스페셜 이벤트를 갖겠다고 했고 머지않아 제플린의 기록 영화가 세상에 나올 것이라고 했다.
그 뒤 미국으로 건너간 제플린은 1월 18일부터 3월 27일까지 투어를 했는데 이 때 지미가 기차를 타고 가다가 열차 차창에 손가락이 끼어 부상을 입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이로 인해서 공연이 취소되지는 않았지만 공연 레퍼토리에서 < Dazed And Confused >는 연주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이곡의 연주는 지미의 손가락 연주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번 투어에서 연주 무대는 더욱 휘황찬란해서 레이저 광선까지 활용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이 투어가 절정에 이를 무렵 2장이 한 세트로 된 새로운 앨범 < Physical Graffiti >가 스완 송 회사의 발행으로 출반되었다.
레코드의 재킷은 레코드사상 유례없이 특이한 이미지의 오묘한 디자인이었다.
수록된 곡은 모두 15곡.
Side 1

  • Custard Pie

  • The Rover

  • In My Time of Dying

Side 2

  • House of The Holy

  • Trampled Under Foot

  • Kashmir

Side 3

  • In the Night

  • Born-Yr-Aur

  • Down By The Seaside

  • Ten Years Gone

Side 4

  • Night Flight

  • The Wanton Song

  • Boogie With Stu

  • Black Country Woman

  • Sick Again

'Physical Graffiti'의 내용은 그동안 제플린에 대해 아주 비판적이었던 평론가들까지도 좋은 앨범이라는 평을 받을 정도였다.
평론가들은 제플린의 각 멤버들이 제각기 자기의 기량을 충분히 발휘했다고 칭찬을 했고 또 제플린의 멤버들은 통일된 음악성을 표현하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이 앨범이 나옴으로써 팬들도 제플린이 지향하는 음악 방향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 Custer Pie >는 제플린의 모든 것을 말해주는 넘버이다. 로버트의 특기 있는 정렬의 보컬과 무그의 신서사이저가 마술적인 분위기를 조상하며 드럼과 기타 역시 뛰어나다.
< The Rover >는 투어를 하면서 체험한 유랑 생활의 정수를 음악에 나타낸 것으로 생동감 넘치는 걸작이다.
< In My Time of Dying >은 밥 딜런의 곡을 제플린 취향에 맞추어 바꾼 것으로 이 앨범중에 가장 펀치력이 있는 곡이다.
< House Of The Holy >에서는 지미가 새로운 기타 솔로의 길을 개척하고 있다.
< Trampled By The Seaside >는 존 폴의 크라비네트가 가미되어 드럼과 기타의 호흡이 맞은 매력적인 넘버이다. 이 곡에 대해 로버트는 자동차에 대해 노래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자동차의 의미가 좀 다르다. 흔히 말하는 그런 자동차가 아니라 자동차의 근원적인 에너지의 바탕이 되는 동력의 구조를 말하는 것이다. 스테이지 위에서 이 곡을 연주할 때는 시각적으로 흥미를 준다. 특히 마지막 쪽의 " Push! Push! "의 부분은 로버트가 그의 정열적인 에너지를 발산한다.
< Kashmir >은 매혹적이고, 교향악적이며 장엄하면서 클래시컬한데 여기에 최면적인 요소와 이국 풍정이 넘치는 분위기까지 감도는 "조곡" 형식으로 되어있다. 이 "조곡"을 듣노라면 갖가지 풍경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그런 특이한 곡이다.
< In The Light >는 제플린의 풍부한 다양성, 복합성을 보여주는 넘버이다. 이 곡의 오프닝은 그것이 고래의 절규를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 로버트의 보컬은 2중으로 녹음된 것이다.
< Born-Yr-Aur >는 그 어느 곡보다도 어쿠스틱 기타가 아름답게 돋보이는 곡이다.
< Down By The Seaside >는 존 폴의 일렉트릭 피아노가 가미되어 로버트의 레이드 백된 듯한 보컬이 절묘한 경지를 이루고 있다. 제플린의 경쾌한 사운드를 보여주는 곡이다.
< Ten Years Gone >은 스테이지 연주에 의해 닦고 닦은 라디오 방송 취향의 곡이다. 그야말로 제플린 타입의 넘버인데 내용은 로버트가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 "첫사랑"을 노래한 것이라고 한다.
< Night Flight >는 제플린의 본 바탕을 노래하는 하드 록 넘버인데 로버트는 여기서 그 어느 곡에서 보다 힘있는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리고 존 보넴은 이를 날카롭고 타이트하게 마무리 짓고 있다.
< The Wanton Song >은 The Band Of Joy의 분위기를 이룩해 주는 곡이다.
드라마틱한 보컬과 탁월한 기타 리프가 이 곡의 장점이다.
< Boogie With Stu >는 지금까지 그 어느 제플린의 것과도 색채를 달리하는 곡이다. 다시 말하면 이 곡은 제플린 답지 않은 곡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한때 Rolling Stones와 행동을 같이 하던 Ian Sterwart가 피아노를 담당, 아주 생생한 감각을 풍겨주고 있다.
< Black Country Woman >은 로버트의 우울한 듯한 보컬을 부각시키는데 주력한 곡이다. 존 보넴의 활기 넘치는 사운드가 주목된다.
< Sick Again >에서는 광기 어린 기타를 들을 수 있다. 미국 투어 중에 얻은 많은 경험을 테마로 한 노래인데 록 뮤직다운 휠링이 아주 짙게 풍긴다 이 앨범이 출반되었을 때 지미 페이지는 자신있게 다음과 같은 주장을 폈다.
지미의 주장에 의하면 제플린의 앨범은 한장 한장이 모두 그 나름대로 특성을 가지며 이 특성은 서로 유사하다든가 그게 그것 같다든지 하는 느낌이 전혀 없는 것에서 확실히 알 수 있다고 한다.
앨범 판매고를 높이기 위해 이 앨범 속에서 한 곡을 뽑아 싱글로 내놓았다.
제플린의 싱글로 스완 송에서 내놓은 첫 싱글이기도 한데 싱글로 뽑힌 곡은 < Trampled Under Foot >였다. 이 싱글은 1천장 한정판으로 나와서 앨범 판매에 촉진제 구실을 했다. 촉진제라고 하게 된 이유는 앨범을 20장 살 경우 이 판을 하나 선사하는 식으로 판매 정책을 썼기 때문이다.
미국 투어도 끝나갈 무렵 근 한달 이상 계속된 로버트의 감기도 점차 나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존 보넴이 위장을 심하게 앓기 시작했다. 그의 위장병은 너무 신경을 많이 썼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의사는 말했다. 그러나 로버트나 보넴의 병보다는 역시 지미의 손가락 상처가 제플린에겐 심각했는데 미국 투어의 막바지에는 그의 손가락도 완쾌되어서 휘날레 공연이라고도 할 수 있는 메디슨 스퀘어 가든의 콘서트에선 그 어떤 곡도 연주할 수 있도록 지미의 손가락은 기능을 되찾았다.
투어에서 보여주는 < Dazed And Confused >는 무드의 기교를 최대로 발휘하는 연주였다. 지미가 바이올린을 켜는 장면에서는 초록과 바이올렛색으로 채색된 드라이 아이스의 연기가 스테이지로 흘러들어왔고 "3각형 모양의 악마의 광선"이 지미를 둘러쌌다. 여기에 금상첨화로 레이저 광선이 비쳐 그야말로 무대의 광경은 환상의 극치를 이루었다. 그밖에도 마그네슘 폭발과 전광 효과가 제플린의 연주 무대 효과를 최고로 장식했다.
투어가 끝나갈 즈음 새로운 앨범에 대한 천중들의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그 반응은 한마디로 갈채의 연속이었다.
존 보넴의 위장병도 그럭저럭 회복되어 갔다. 그는 1천 4백달러를 주고 포드 자동차의 모댈을 사가지고 선셋 대로에서 트럭 경주를 즐기는데 여념이 없었다.
시가지에서는 자동차 경주를 하면 당장 걸려들게 되있었지만 그 많은 자동차 경주를 했음에도 그는 꼭 한번 교통 경찰에게 적발되었을 뿐이었다. 한번 적발은 되었어도 벌금은 내지 않고 넘어갔다. 자기들은 레코드 취입을 해야되는 뮤지션으로 격무에 시달린 마음을 스피드로 풀어가고 있는 중이라고 사정을 했더니 그 단속 경찰은 그대로 보내주었다고 한다.
하여튼 미국 연주여행은 크게 성공했고 그 때문에 레코드의 매상도 크게 올랐다.
그리고 제플린이 내놓은 6장의 앨범을 하나도 빼지 않고 모두 빌보드 챠트 상위에 올랐다.

  • Earl's Court

5월, 멜 부쉬와 피터 그랜트는 2년만에 열리는 영국에서의 콘서트를 기획, 입장 정원 1만 7천명의 런던 Earl's Court에서 세번 공연하기로 했다. 그런데 워낙 많은 표가 팔려서 당초 3회 공연할 계획을 5회 공연으로 늘렸다.
당시 영국의 신문들은 많은 지면을 제플린을 위한 기사로 채웠다. 미국에서의 공연 실황을 거의 매일처럼 보도했고 'The Sun','Daily Mirror' 등은 일요일 판마다 제플린의 기사를 사진과 곁들여 소식을 전했다. 제플린은 이미 매스컴을 가장 많이 타는 록 그룹이 되어 있었다.
Earl's Court에서 열린 콘서트는 5월 23일, 24일, 25일로 정했다가 뒤이어 6월 17일, 18일 양일간 더 연장키로 했다. 연주 시간은 3시간 내지는 4시간, 입장료는 1파운드에서 2파운드 50펜스 까지 였다. Earl's Court 공연에서는 미국의 공연 이상으로 특수 효과장치를 도입했다. 무대의 오른쪽 윗 공간에는 거대한 비디오 스크린을 설치, 항상 제플린 멤버의 얼굴을 클로즈 업으로 비췄다.
"Welcome Home! Led Zepplin!"하는 아나운서의 인사가 들리면서 로큰롤의 요란한 연주가 폭탄처럼 터져나오자 청중은 열광하기 시작했다.
< Trampled Under Foot >의 즉흥 연주에서는 각종 조명이 만화경처럼 비쳐서 마치 번갯불이 번쩍이는 장면을 방불케 했다. 또 제플린이 어쿠스틱 세트라 부른 통기타와 보컬이 함께 하는 코너에서는 멤버 전원이 부르는 코러스까지 들을 수가 있었다.
4천 파운드라는 거금을 들여 설치한 거대한 비디오 스크린은 맹렬하고도 폭발적인 효과를 가져왔고 멤버들 개인 개인의 특유한 제스츄어에서, 얼굴 하나 하나의 표현까지 마치 50센티 거리이서 보는 것처럼 아주 상세하게 비쳐주었다.
제일 마지막으로 연주된 곡은 < Stairway To Heaven >이었다.
런던의 콘서트가 끝난 뒤 제플린 멤버들은 제각기 자기 시간을 내서 1주일의 휴가를 가졌다.
Earl's Court에서의 콘서트에 앞서 제플린은 3일 동안의 리허설을 했는데 이러한 사전 연습은 거의 드문 일이었다. 왜냐하면 제플린의 연주회는 그것이 곧 내일의 연습과 반성을 위한 연주이기도 했다. 제플린은 사소한 연주 장면도 녹음을 했다. 그 녹음을 듣고 고칠 것은 고치고 반성할 것은 반성을 했다. 그리고 녹음을 들으면서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사운드, 더 훌륭한 연주를 할까 연구, 검토했다. 그런데 그토록 제플린의 인기가 높았음에도 한가지 이상한 일이 있었다. 제플린이 연주하는 음악을 정작 영국이 라디오에서는 거의 들을 수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미국에서는 그 어느 라디오국에서는 제플린의 노래를 앞을 다투어 틀었는데 영국에서는 John Phil의 프로와 Allen Freeman의 프로에서만 제플린의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제플린 멤버들은 공연을 앞둔 날이면 절대로 술을 마시지 않았다. 공연 전에 다소 술을 마시고 싶으면 홍차로써 대신했다. 그리고 각 멤버들은 공연을 앞두고 초조할 때면 서로를 위로하며 마음을 안정시키도록 노력하는 것이었다.

  • Melody Maker의 인기 투표

7월 지미, 로버트, 폴 세사람이 소득세 법 위반으로 영국 입국을 거부당하고 스위스에 체류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런 도중에 설상가상으로 8월 4일, 그리스의 로도섬에서 휴가를 즐기던 로버트 가족의 승용차가 사고를 일으켰다. 런던의 일류 병원의 의사가 수혈용 혈액을 가지고 로도스 섬으로 날아가서 로버트 일가의 치료를 맡았는데 상처는 심해서 의식불명 상태로 런던까지 공수되었다. 혼수상태에서 수술까지 받았다. 로버트의 부인은 중상이었으나 애들은 무사했다. 로버트도 경상은 아니었다. 그러나 영국의 국법을 어긴 로버트는 다시 추방되어서 가족과 멀어질 수 밖에 없었다.
로버트는 다시 져어지 섬으로 갔다. 거기서 귀양살이와도 같은 나날을 보냈다.
로버트는 불안한 나날을 보내다가 2,3주후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 멤버와 함셰 리허설을 하기로 했다.
Melody Maker지에서 인기투표의 결과를 발표한 것은 제플린 멤버들이 로스엔젤리스 한가하게 휴식을 취하던 때였다. 그런데 멜러디 메이커의 발표에 의하면 제플린은 7개의 부문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 시상식에 참가하기 위하여 지미는 런던을 향해 출발했다.
수상식에서는 시상을 맡은 Billy Conneley는 많은 참관자를 위해 일장 연설을 했다. "놀라운 결과를 발표하겠읍니다." 이렇게 발표한 그는 한참 서론을 늘어 놓은 뒤에 결과를 밝혔다.
또 이 앨범은 존 폴 존스의 뛰어난 음악적 창조력과, 존 보넴의 음악적 주체성을 여지없이 과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칭찬을 받은 존 폴은 '나는 그냥 로버트를 따라서 스튜디오에 들어간 것 뿐이고 그저 하라는 대로 했을 뿐'이라고 겸손해 했다.
< Fool In The Rain >이 미국에서 싱글 커트되어 차트 20위까지 올라갔으나 제 2탄의 싱글로 예정되어 있던 < All My Love >는 무슨 이유인지 흐지부지 되어 세상에 나오질 못했다.
11월 25일 로버트는 또 다시 Wembley Empire의 축구에 참가했다. 그리고 며칠 뒤 Melody Maker가 수여하는 1979년도 인기 투표의 결과가 발표되었다.
레드 제플린은 7개 부문에서 탑을 차지하고 있었다. Melody Maker의 상이란 상은 마치 모두 제플린에게 상을 주기 위해 창설된 것만 같았다.
수상식에는 지미를 제외한 전원이 참석했다. 상패를 수여한 Michael씨는 이렇게 상을 휩쓸어 갔다가 혹시 다른 뮤지션들한테 강도라고 불리게 되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농담도 했다.
12월 26일 BBC라디오 런던은 90분 짜리 'Echoes'를 보냈는데 여기서 지미와 로버트는 나란히 출연, 새 앨범도 소개하면서 지루하지 않은 대담을 보내주었다.
본래 이 방송용 테잎은 10월에 제작한 것으로 크리스마스를 겨냥해서 미리 제작해 놓은 것이었다.
이 대담 프로에서 두 사람은 제플린의 음악에 있어서 그 뿌리를 상세하고도 친절하게 설명을 했다. 제플린이 갖고있는 약점과 장점을 조금도 거짓 없이 솔직하게 털어 놓았는데 그렇다고 해서 이 방송을 듣고 제플린을 얕잡아 평가할 수 없으리만큼 아주 정감있게 대화를 나누었다.
BBC에서는 또다시 제플린의 프로그램을 방송했다. 1969년에 생방송으로 나간바 있는 'In Concert'란 프로의 녹음테이프를 재방송한 것이다. 이 재방송은 전국 네트워크를 통해 방송되었는데, 젊은 팬들은 왕년의 제플린의 연주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다.
12월 29일에는 영국의 Hamersmith Oden에서 개최된 UNICEF의 캄보디아 난민 구제를 위한 자선 콘서트에 출연했다. 제플린이 출연한 것은 하룻밤 뿐이었고 Wings가 주연급으로 출연하고 있었다. 로버트는 Dave Edmunds와 Rdckpile과 더불어 예날 엘비스 프레슬리의 < Little Sister >를 노래했고 뒤이어 앵콜에는 < Let It Be >등을 연주했다.

  • Led Zepplin Over Europe 콘서트

1월 16일, K-tel레코드는 국제아동 연금을 기념해서 13곡이 들어있는 자선 모금 베스트 앨범을 내놓았다. 이 앨범에는 재플린의 곡 < Candy Store Rock >도 수록되어 있었는데 재킷에는 앨범의 계획에 동의하는 제플린 멤버들의 서명이 들어 있었다.
80년대에 접어들면서 미국은 제플린에게 최대의 찬사를 보냈다. 잡지 Creem과 Circus에서 음악분야의 대부분의 상을 제플린에게 주기로 한 것이었다. 두 잡지사에서 수여하는 상이란 상은 거의 제플린이 맡았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 Stairway To Heaven >은 70년대의 넘버원 송으로 꼽았다. 제플린에게는 정말 생각하지도 못했던 상이었고 기야말로 "호박이 넝쿨째 떨어진 격"이었다.
2월, 로버트는 버밍엄에서 Rockpile의 게스트로서 스테이지에 섰다. 그리고 3월 상순 존 보넴은 TV영화의 테마 뮤직을 작곡하기도 했다.
4월이 다 갈 즈음, 제플린은 런던에 있는 Rainbow Theatre에 들어가 며칠간의 연습을 했다. 그런데 이 사실이 중도에 보도되어서 이들은 또 다른 장소를 찾지 않을 수 없었다. 이리하여 제플린의 유럽 투어 뉴스가 공식화 되었다.
Harvey Goldsmith에 의해 기획된 이 투어는 5월초 비엔나에서부터 시작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연습이 이럭저럭 늦어져서 공연 날짜는 뒤로 미루어졌고 6월 6일에야 첫공연을 하게 되었다. 연주여행 첫 무대는 독일의 Dortmund였다.
연주여행의 일정을 보면 18일-케문, 20일-부랏셀, 21일-로텔담, 23일-브러맨, 26일-비인,...이러한 순서로 진행케 되어 있었다.
이렇듯 타이트하게 짜여진 유럽 투어가 끝나면 곧 미국으로 향해서 다시 미국내 투어을 하도록 예정되어 있었다.
스테이지는 보통 2시간에서 2시간 30분 정도의 공연 스케쥴이었다. 유럽 각지에서의 평균 청중수는 4천 명에서 1만명 사이였다.
연주여행 도중 지미는 셔츠와 바지등 의상을 자주 바꿨다.
반면에 로버트는 언제나 처럼 녹색의 T셔츠에 청바지를 입었다. 그리고 각 멤버의 헤어스타일은 1969년때의 그 모습이었다. 그런데 우연인지는 모르나 오프닝 넘버가 또 의례 1969년대의 것이었다.
가는 곳마다 팬들로부터 절찬을 받은 제플린의 연주는 어딘가 조금 변한 곳이 있었다.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것들이 나타났는데 그 중에 하나가 스테이지의 변화였다. 지금까지의 스테이지는 호화판 일변도였었는데 이번에는 상당히 소박해져 있었다. 그러나 변화무쌍한 조명이라든가 < Trampled Under Foot >에서 객석을 향해 온통 조명을 비치는 조명은 여전했다. 이렇게 휘황찬란하던 조명이 < No Quarter >가 시작되면서 부터는 모두 사라지는 것이었다. 오직 비치는 곳은 바이얼린을 연주하는 지미에게만 스쿠프 라이트를 쓰는 것으로 조명 방법이 달라져 있었다.
연주곡은 보통 13곡으로 스테이지에서는 < All My Love >가 처음으로 레코딩에 적합하게 연주되고 있었다.
이번 연주회에서는 모든 것이 중간 정도의 규모였다. 규모가 적어졌기 때문에 멤버와 청중 사이에는 친밀한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특히 지미는 이러한 무대 생리가 마음에 드는지 그는 여느 때보다도 무대위를 많이 돌아다니면서 연주를 했다.
이번 연주회에서 또하나 전에볼 수 없었던 광경은 지미가 곡이 바뀔 때마다 곡목을 소개하는 것이었다. 때로는 그 나라의 언어로 곡목을 소개하기도 했는데 지미의 발음이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무척 애교가 있어 보였다. 이러한 곡목의 소개는 그 나라 청중을 한층 더 기쁘게 해주었다.
그런데 청중들의 반응이 굉장했는데도 영국의 신문, 잡지들은 제플린의 구라파의 연주여행 소식을 거의 보도하지 않았다. 반면에 구라파의 많은 매스컴들은 제플린의 활동을 소상하게 그리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Steve Gheft는 뮌휀에서의 제플린 공연 실황을 Melody Maker지에 실었다.
페이지의 사진을 곁드여 보도한 기사가 근대 제플린에 대한 보도의 전부였다.
스티브가 쓴 뮌휀 공연에 대한 기사를 보면 제플린 멤버가 청중과 혼연일체가 되어서 정말로 즐거운 연주 여행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제플린은 독일 Nuremberg에서는 3곡만을 연주하고 공연을 중단했다. 존 보넴이 무대위에서 쓰러진 것이다. 놀란 것은 멤버뿐 아니라 청중도 마찬가지였다. 장내는 한때 물을 끼얹은듯 조용했다. 급히 병원으로 옮겨진 존 보넴은 응급조치를 받았다. 정신을 차린 존 보넴은 그래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러나 의사의 선고는 무거웠다. 쓰러진 원인은 극도로 피로가 겹친 데에 있었다.
이틀 뒤 스위스이 Zurich에서는 존 보넴도 무대에 설 수 있었다. 그러나 공연이 끝난 뒤 그는 심한 복통을 호소했다.
1980년 유럽의 여름은 몹시 무더웠다. 낮뿐 아니라 해가 진 뒤에도 무더위는 가시지 않았다. 한밤에도 비지땀을 흘려야 했고 에어컨을 가동시킨 방에서도 더위 때문에 잠을 이룰수가 없었다. 이러한 무더위는 공연장에서도 역시 고약했다. 특히 지미는 땀을 대단히 흘려 지미가 머리를 흔들때마다 그 땀이 객석으로 튀어 가는 것이 육안으로도 보일 정도였다.
이 투어를 소재로 한 책이 2권 발행되었다. 한 권은 'Viva Rock'이라는 일본말로 된 사진 화보집이었는데 유럽 투어 모습을 컬러와 흑백으로 엮은 도큐멘터리였다. 그리고 또 한 권은 제플린의 유럽공연을 동행한 Dave Lewis가 쓴 기행문이었다.
이 책에서 데이브 루이스는 구라파 투어를 하고 있는 제플린과 그 멤버들의 소상한 생활을 숨김없이 기술했다.
로버트가 그 어느 투어보다도 뜻있게 보냈다는 내용으로 시작해서 각 멤버들의 습관, 기습, 식성에 이르기까지 알려지지 않은 화제도 많이 담고 있었다.
이즈음에도 존 보넴의 위통은 자주 일어났다. 한번 위통이 일어나면 그는 얼굴이 창백해질 정도로 고통을 겪는 것이었다. 주위에서 근본적인 치료를 해야할게 아니냐고 물으면 그는 별로 근심할 정도가 아니라면서 활짝 웃어보였다. 그러나 그 웃음 뒤에는 몹시 견디기 어려운 고통의 그림자를 엿볼 수 있었다.
유럽 투어는 Knebworth 훼스티벌 이래 처음 열리는 큰 것이었으나 웬 일인지 연주 프로그램은 제작되지 않았다. 또 프로그램 대신 투어 출발에 앞서 촬영된 대형 컬러 포스터가 스완 송 레코드 회사 발행으로 판매되고 있었다.
이밖에 제플린의 심벌 마크가 새겨진 뱃지가 나왔고 제플린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페넌트가 팔리고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상품들은 제플린이 가는 곳이면 어디서든 날개 돋힌듯 팔렸다.
투어가 끝나자 로버트 플랜트와 존 폴 존스와 존 보넴은 각기 가족과 함께 단란히 지내기 위해 가정으로 돌아갔다.

  • 존 보넴의 죽음

1980년 9월 25일 그날은 목요일이었다. 이날 정말 뜻밖의 사고가 일어났다.
제플린 멤버의 한 사람인 존 보넴이 싸늘한 시체로 발견된 것이다. 그가 시체로 발견된 집은 Windsor에 있는 저택인데 8월에 지미가 영화배우 Michael Caine으로부터 90만 파운드의 거액을 주고 산 저택이었다.
존 보넴의 시체를 살펴본 담당의사는 처음에는 사인을 규명하지 못했다. 그래서 혹시나 그가 자살하지 않았나 하는 의문도 있었지만 그 역시 분명치가 않았다.
뒤이어 사인을 규명하기 위해 사체 해부를 했다. 그럼에도 사인은 규명되지 않았다. 그러나 10월 8일 Daily Express지는 "존의 사인은 과도한 알콜 중독이었다"고 보도했다.
존 보넴은 평소에 심하게 술을 마시지는 않았으나 죽기 전날 과음을 한 사실이 밝혀져서 결국 그의 사인은 "술 때문"이라고 결론이 났다.
나중에 소상히 밝혀진 바에 의하면 존 보넴은 죽기 직전까지 연속 2시간 이상을 보드카를 오렌지에 타서 마셨다고 한다. 강한 보드카를 연거푸 마셨기 때문에 그의 혈중 알콜농도는 보통사람의 3.5배에 달해 있었다. 해부를 맡았던 병리학자 에드먼드 박사는 법정에서 알콜로 인한 사망임을 증언했다. 그는 배심원들 앞에서 존 보넴이 무슨일 때문에 많은 술을 마셨는지 모르겠으나 너무 많은 술을 마셨기 때문에 의식을 잃었고 혼수 상태에 빠진 것이 그대로 깨지 못하고 영원히 잠든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존의 운전수겸 비서인 Rex Kim은 사망하기 하루 전의 존의 행동을 증언했다.
그는 죽기 전날인 9월 24일 점심을 먹은 뒤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처음 마시기 시작한 곳은 존의 자택 근처인 자그마한 스탠드 바라고 한다. 그는 이 술집에서 아주 진한 보드카를 오렌지 쥬스에 섞어 마셨는데 5잔쯤 마셨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리허설에 참가하기 위해 윈저로 향했다. 그는 계속 리허설 스튜디오에서도 술을 마셨다. 그리고 지미의 집을 향했는데 지미의 집에서도 또 보드카 오렌지를 한 시간에 2잔에서 3잔 꼴로 마셨다.
새벽 0시경 존은 몹시 취해서 소퍼에 잠들어 버렸다. 이것이 존의 마지막 잠이었다.
소파에서 곤드레가 되어 자는 존을 킴과 지미 페에지의 비서인 Rick Hobbes가 맞들어 2층의 침실로 옮겨다 눕히었다. 6시간 뒤 제플린의 매니저 중의 한 사람인 루이스가 지미의 집에 도착, 존을 깨우기 위해 2층으로 올라갔다. 이래서 그는 처음 시체를 발견한 사람이 되었는데 의사를 불렀을때 존 보넴의 시체는 이미 싸늘해진 뒤였다.
이러한 비극은 제플린의 장래에 대해서 여러가지 억측을 낳았다. 한편 각 매스컴은 그의 보도를 크게 실었다.
Melody Maker에서는 록의 커다란 별하나가 졌다고 애도했도 Record Mirror에서는 존 보넴은 결코 잔재주를 피우는 뮤지션이 아니었다고 애도했다. Rolling Stones는 존 보넴은 놀랄만한 재능을 가졌던 천재였고 그를 능가할 뮤지션은 다시 나오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각 매스컴은 이미 페이지도 존 보넴이 없이는 그의 전 기량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라고 내다 보았다.
존 보넴의 장례식은 그의 농장 근처의 작은 교회에서 있었다. 제플린과 고인의 가족들은 보넴의 장례식을 극비리에 갖기로 했다. 그리하여 10월 10일 금요일 오전에 장례식이 있었는데 하늘도 슬펐던지 비가 내렸고 장례식을 알고 찾아온 팬은 겨우 6명 뿐이었다.
영국의 일간지들은 존 보넴이 죽은 뒤 제플린은 해산할것 같다고 보도했다.
그런가 하면 또 며칠 뒤에는 새로운 존 보넴의 후임자가 곧 발표될 것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그러나 12월 4일 목요일 레드 제플린은 유명 신문에 다음과 같이 성명을 발표했다.
"우리는 다정한 친구의 죽음에 즈음해서 고인의 가족에 깊은 애도의 뜻을 밝힘과 동시에 우리와 그리고 매니저들이 지니고 있던 화목함과 연대감을 다시 확인하면서 더 이상 활동을 계속하기에는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이를 팬 여러분께 알려드립니다." 제플린이 해산한 뒤 항간에는 여러가지 억측이 나돌았다. 지미 페에지는 기타 워크의 프로젝트에 큰 관심을 기울인다고 보도되었다.
제플린이 해산한 뒤에도 또 다시 재출발할 것이라는 풍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이러한 풍문은 어쩌면 팬들의 바라는 바가 너무도 컸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었다.
팬들은, 자신들이 제플린의 해산을 반대하는 소리가 높아지면 제플린은 어쩔수 없이 다시 모일 것이라고 기대했었다. 그러나 열렬한 팬들의 성화에도 제플린 멤버들 마음을 흔들지 못했다. 존 보넴에 대한 애도의 마음은 그만큼 멤버들 마음에 가득차 있었던 것이다.
존 보넴. 그는 영국을 대표하는 드러머였다. 그가 없었다면 제플린의 초기의 성공이 있을 수 없었을 것이고 결과적으로 제플린이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드럼은 지미 페이지의 기타 플레이를 능가하는 것이었다. 그의 드러밍을 보면 누구나 흥분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다.
그는 평소 맥주를 즐겨 마셨다. 그러나 취할 정도로 마시는 날은 거의 없었다.
그에게 언짢은 일이 있었다면 그는 술을 마시는 대신 드럼을 두들겼다.
그런데 불행중 다행으로 그가 죽은 뒤, 그의 죽음을 장사로 이용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존 레논, 엘비스 프레슬리, 지미 헨드릭스, 마크 볼란, 브라이언 존스 등은 그들이 죽은 뒤에는 재산 다툼과 그들의 죽음에 편승한 "상혼"이 고개를 들었는데 존 보넴이 죽은 뒤에는 그런 추태는 전혀 벌어지지 않았다. 1980년 12월 뉴욕 자택앞에서 존 레논이 사살된 이래 제플린의 멤버들은 각기 신변 보호에 철저를 기하고 있다. 그들의 이러한 호신책 때문에 제플린의 멤버들은 뒷 소식은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존 레논 사건을 계기로 살아남은 재플린 멤버들의 사생활은 짙은 베일속에 싸이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제플린의 재결성 소식은 끈질기게 나오고 있다.
잠잠한 가운데 심심찮게 나오는 제플린의 재결합설...과연 이루어질 것인지는 전능하신 신만이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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