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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248
마음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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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수 : 41982
2010.03.19 (21:51:55)
ARTIST:  Jethro Tull 
COUNTRY:  U.K. 
GENRE:  Progressive Rock 
ALBUM:  1968 This Was
1969 Stand Up
1970 Benefit
1971 Aqualung
1972 Thick as a Brick
1973 A Passion Play
1974 War Child
1975 Minstrel in the Gallery
1976 Too Old to Rock 'n' Roll: Too Young to Die!
1977 Songs From the Wood
1978 Heavy Horses
1978 Live: Bursting Out
1979 Stormwatch
1980 A
1982 The Broadsword and the Beast
1984 Under Wraps
.
.
MEMBER:  Ian Anderson (vocals, flute, acoustic guitar, harmonica, mandolin)
Mick Abrahams (electric guitar, 1967-68)
Glenn Cornick (bass, 1967-70)
Clive Bunker (drums, 1967-71)
Martin Barre (electric guitar, acoustic guitar, recorder, 1968-present)
John Evan (piano, organ, synthesizer, 1970-80)
Jeffrey Hammond Hammond (bass, alto recorder, 1971-75)
Barriemore Barlow (drums, 1971-80)
John Glascock (bass, 1975-79)
David Palmer (saxophone, keyboards, orchestral arrangements, 1976-80)
Dave Pegg (bass, mandolin, 1979-95)
Mark Craney (drums, 1980-81)
Eddie Jobson (violin, 1980-81)
Peter-John Vettese (keyboards, 1981-87)
Gerry Conway (drums, 1981-83) 
원본출처:   

  팝과 록을 즐겨들었던 내게 있어서 프로그레시브 아티스트들의 실험정신은 매우 이질적으로 느껴져 처음에는 거Jethro_Tull.jpg 부감이 들기도 했지만, 신선함도 적지않이 있었다. 어쩌면 새로운 것에 대한 거부감과 신선함 사이의 싸움에서 “신선함”이 승리함에 따라 오늘 여기까지 와 있는 지도 모르겠다. 당시 필자가 경험했던 신선한 충격은 여러 가지가 있다. 한때 키스 에머슨의 연주에 흠뻑 빠져, 신디사이져나 키보드 연주가 들어간 음악은 무조건 프로그레시브 록이라고 착각하기도 햇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바로 록 음악에 록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는 악기들이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요즘 들어서는 클래식 악기가 대중 음악에 사용되는 일이 빈번히 일어나지만 그 당시만 하더라도 이러한 류의 음악은 매우 이질적인 그 무엇으로 다가왔다. 이러한 기회를 처음으로 제공해 준 아티스트 중의 하나가 바로 이번에 소개되는 Jethro Tull 이다. 필자가 제스로 툴의 음악을 처음 접한 것은 이미 이들의 명성이 쇠퇴하고 있던 80년대 초반이었다. 물론 필자가 들은 것은 그들의 쇠퇴기의 음악이 아니라 전성기인 70년대의 작품이었다.

제스로 툴은 음악 관련 잡지에서 가장 자주 다루어지는 그룹 중 하나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전세계의 팬들은 그들의 음악을 즐길 수 잇었다. 특히 그룹의 리더로서, 작시가이자 독특한 플륫 주자인 Ian Anderson의 존재는 프로그레시브 록 신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화제거리이기도 했다. 이들의 두 번째 앨범 [Stand Up] 이후로 제스로 툴은 이언 앤더슨의 밴드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이언 앤더슨이 곧 제스로 툴이라고 믿고 있다.

 

Jethro Tull 결성 이전

제스로 툴의 이야기는 66년 블랙풀로 거슬러 올라간다.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 출신의 이언 앤더슨은 그곳에서 두명의 친구  Jeffrey Hammond-Hammond(제프리 하몬드-하몬드), John Evan(죤 에반),과 함께 Blade라는 그룹을 결성한다. 이언은 기타와 보컬을, 제프리가 베이스, 존이 드럼을 맡았다. 얼마 후 그들은 버밍햄 출신의 드러머 Barriemore Barlow(배리모어 발로우)를 받아들여 4인 편성의 활동을 하게 된다. 이에 따라 이미 드럼을 담당하던 존 에반은 키보드로 그 역할을 바꾸게 된다. 동시에 이들은 그룹의 이름을 The John Evan Band로, 후에 John Evan's Smash로 바꾼다 이러한 과정에서 제프리가 탈퇴하고, 그 자리를 Glenn Cornick(글렌 코닉)이 메우게 된다. 하지만 그룹명에 나타난 것처럼 존이 그룹의 리더 역할을 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는 순전히 경제적인 이유에서였다. 당시 그룹이 이동할 때 타고 다니던 차의 임대로를 지불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멤버들이 그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그룹명을 그렇게 정한 것이었다.

당시 런던을 휩쓸던 블루스 록 붐에 편승한 이들은 상업적 성공을 위해 또 한번의 변신을 한다. 하지만 제프리를 대신해 들어온 글렌 코닉이 그들에게 성공을 보장해 주지는 못했다. 그들은 커다란 희망에 가득차 지방으로 떠나지만 그것이 곧 환상에 불과했음을 깨닫게 된다. 결국 당연한 귀결로 그룹은 깨어지고 이언 앤더슨과 글렌 코닉만이 남쪽에 머물러 있으면서 다음 기회를 노리게 된다.

 

Jethro Tull의 결성과 데뷔 앨범 [This Was]

cover_3926172242009.jpg 모든 수퍼 아티스트들이 그렇듯이 제스로 툴 역시 “어느날 갑자기 일어나 보니”스타가 된 것이 아니라 많은 역경과 노력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67년 11월 John Evan's Smash가 해산되기 직전 Luton의 The Beach Comber Club에서 이언과 글렌은 당시 McCgregor's Engine(67년 1월에서 11월까지 활동)이라는 그룹으로 활동하고 있던 Mick Abramhams(믹 아브라함즈, 기타)와 Clive Bunker(클리브 벙커, 드럼)를 만나게 된다 이들은 John Evan's Smash의 에이젼트이자 Terry Ellis(제스로 툴의 프로듀서 역할을 하게 된다.)와 함께 후에 Chrysalis를 설립하는 인물 Chris Wright의 제의로 록과 블루스, 재즈가 혼합된 형태의 음악을 구사하는 새로운 그룹 Bag Of Blus를 결성하기로 한다. 당시 그룹의 리더는 믹 아브라함이었으며, 이언 앤더슨은 후에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는 플륫연주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들이 무대에 서면서 몇 차례 이름을 바꿔야 했던 이유는 단 한가지다 그들의 연주는 청중들의 관심을 끌 수가 없었고, 그 이름을 가지고는 또 다시 참여해 달라는 요청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는 속담처럼 정말로 성공한 경우가 생기게 되는데 당시 채택했던 이름이 바로 Jehthro Tull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진짜 성공했던 이름은 Jethro Tull이 아니라 Jethro Toe였다. MGM에서 발매된 그들의 데뷔 싱글은 Jethro Tull이 아닌 Jethro Toe라고 잘못 표기되어 발매되었기 때문이다.) 그 작품은 아브라함즈의 <Sunshine Day/ Aeroplane>이었는데, Marquee에서의 연주에서도 열광적인 환호를 받기도 했다.

제스로 툴은 68년 여름에 열린 썬베리 블루스 페스티벌에서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다. Nothern Echo라는 잡지의 평은 이러했다. “Cream은 이제 모두 끝났으며 사라졌다. 그러나 나는 또하나의 그룹이 그들의 빈 공간을 메꾸어 놓았다고 확신한다. 그들은 색다른 이름인 Jethro Tull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Cream의 위치를 계속 이어받는 음악을 만들어 낸다. 이들은 올해의 그룹이 될 것이며, 적어도 70년대의 그룹이 될 것이다.” 이러한 성공에 힘입어 이들은 그해 10월 데뷔앨범 [This Was]를 발표한다. 이언의 플륫 연주를 제외하면, 그 당시를 풍미하던 록큰롤과 블루스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곡으로 채워진 앨범으로 아직 아마츄어 냄새를 풍기는 앨범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앨범의 가치가 줄어드는 것은 결코 아니다. 클래식 악기로만 알려져 있던 플륫을 록 신에 사용했다는 것 가체가 커다란 모험이었고, 결국 그러한 시도가 성공한 것이다. 모든 곡에서 들을 수 있는 플륫연주는 다른 악기와 보조를 맞추면서 연주되고 있다. 특히 이언이 처음 플륫으로 배운 곡인 재즈 뮤지션 롤랜드 커크의 곡 <Serenade To A Cuckoo>, 제프리 해먼드-해먼드가 만든 클랙혼이라는 악기와 클라이브의 솔로 드럼 연주가 돋보이는 <Dharma For One>(이 곡은 마치 이태리의 프로그레시브 록 그룹 뉴트롤즈의 <Nella Sala Vuota>에 나오는 후반부의 드럼 솔로를 생각나게 한다. 또한 이 곡이 수록되어 잇는 뉴트롤즈의 앨범 [Concerto Grosso Per I]가 플륫 연주를 많이 담고 있음도 흥미롭다.). 믹 아브라함즈의 작품으로 대중적 인기를 얻은 하드한 사운드의 기타 연주곡 <Cate Squirrel>등이 주목할 만한 곡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앨범에서 가장 “제스로 툴 다운”(물론 이말은 이 앨범 발표 후 그들의 지속적인 활동을 근거로 판단해서 쓰는 용어이다.)곡은 <A Song For jeffery>다. 블루스적인 색채보다는 아트록적인 요소가 더욱 진하게 스며있는 이 곡은 다른 곡에서는 조심스럽게 사용되던 플륫이 전면에 나서 곡을 이끌어가면서, 약간의 이펙트 효과를 가미한 이언의 목소리가 특이한 곡이다. 이 곡은 그룹의 전 멤버였던 Jeffery Hammond-Hamon에게 바치는 곡이기도 하다.

제스로 툴의 데뷔앨범은 큰 성공ㅇ르 거두었고, 그룹의 라이브 연주에 큰 힘을 북돋아 주었다. 특히 이언 앤더슨의 약간은 과장된 몸짓과 단정하지 못한 머리카락, 남루한 옷차림과 한 쪽 다리를 들고 연주하는 모습은 그룹의 모든 것을 상징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많은 팬들로 하여금 이언과 나머지 멤버들의 관계를 수평적 관계가 아닌 수직적 관계로 인식하게 하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만다.

 

믹 아브라함즈의 탈퇴 - 블루스 지향성에서 아트록 지향성으로

cover_4613172242009.jpg 또한 그룹 내의 블루스 지향성과 아트록 지향성의 혼재는 필연적인분열을 불러일으켰다. 전통적인 블루스 록을 지향했던 아브라함즈와 플륫으로 대표되는 이언의 음악적 견해 차이는 개인적 충돌을 낳을 수밖에 없었다. 제스로 툴의 애초의 출발점은 분명 블루스 밴드로서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명칭에 걸맞지 않는 이언 앤더슨이 이러한 과정에서 도태되는 것은 자명한 사실처럼 보였고 실제로 그룹의 첫 번째 방출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대중들의 반응은 정반대였다. 결국 상황은 정반대로 전개되어 이언은 그룹의 확실한 리더로 남게 되는 반면, 아브라함즈는 탈퇴해 McGregor's Engine당시의 친구 Andy Pyle(베이스)과 함께 Blodwyn Pig를 결성하게 된다. 제스로 툴 결성 꼭 1년이 되는 68년 11월의 일이었다.

믹 아브라함즈의 탈퇴는 제스로 툴의 첫 미국 투어 준비과정에서 갑자기 발생했다. 그래서 그를 대신할 만한 멤버가 시급히 요구되었다. 그래서 그를 대신할 만한 멤버가 시급히 요구되었다. “록큰롤 서커스”라는 TV쇼에 참여해 Tony Lommi(나중에 블랙 사바스ㅏ의 멤버가 되는)와 연주하기도 하고 Nice의 Davy O'List와 며칠동안 일하기도 하지만 결국 그룹의 일원이 된 사람은 이후 영원한 제스로 툴의 멤버가 되는, 당시만 해도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던 Martin Barre(마틴 바)였다. 이렇게 그가 새로 가입해서 만든 곡이 <Living In The past>이다. 이곡은 커다란 성공을 가져다 주었고 록의 클래식이 되었다. 이러한 외형적인 변화는 내부적 모순이 극복된 형태로 제스로 툴의 향후 모습을 짐작케하는데 충분하다. 이언은 첫 번째 앨범의 블루스 전통을 계승하는 동시에 그룹의 고유함을 찾기 위해 초기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했다. 그의 이러한 노력이 나타난 것이 미국투어에서 돌아와 69년 7월 에 만든 두 번째 앨범 [Stand Up]이었다. 데뷔앨범에서 짙게 풍기던 블루스적인 분위기는 상당 부분 감소되었으며, 그 대신에 록큰롤 리듬이 앨범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아브라함즈 대신에 가입한 마틴 바의 기타 사운드가 이러한 경향에 일조하고 있다.

이 앨범은 발표되자마자 챠트의 정상을 차지했고 밴드를 중요한 록 뮤지션으로 확립시켰다. 이는 또한 아브라함즈를 대신해 기타를 담당해준 마틴의 가입이 성공을 거두었다는 평가를 내리게 했고, 앤더슨은 더욱 뛰어난 송라이터의 자리를 궅히게 된다. J.S. Bach의 작품 <Bouree>(물론 이곡도 앤더슨에 의해 편곡되었다.) 이외의 모든 트랙은 그의 작곡이었다. 이 앨범은 매우 인상적인 커버를 가지고 있는데, 네멤버의 얼굴을 판화에 담아 찍어낸 바깥쪽의 커버를 펼치면 멤버들의 모습을 담은 종이 그림이 벌떡 일어선다. 앨범명 그대로 Stand Up이다. 그리고 이는 자신들이 비로소 대중 앞에 우뚝 설 정도의 자신이 생겼다는 뜻이기도 하다. 앨범 최고의 곡 <Bouree>에서 앤더슨은 격렬하지는 않지만 열정적이고도 섬세한 플륫 연주를 들려주고 있다. 영국의 멜로디 메이커는 69년도의 Best Band Of The Year 부분에 Beatles에 이어 이들을 2위로 올려놓았다.

 

이언 앤더슨 본격적인 주도권 - 세 번째 앨범 [Benefit]

cover_947152292009.jpg 다음해 이들은 커다란 성공을 거두게 되는 싱글 <The Witch's Promise/Teacher>를 발표한다. 이는 순전히 싱글용으로 만든 것으로 후에 컴필레이션 앨범 [Living In The Past]에 수록되게 되지만 <Teacher>같은 곡은 다른 버전으로 수록된다. Jethro Tull의 전신이라고 볼 수 있는 John Evan's Smith의 멤버였던 존 에반은 <The Witch's Promise>에 게스트로 참여하고, 70년 4월에 발매된 세 번째 앨범 [Benefit]에 정식으로 참여한다. (하지만 앨범 커베어서 그의 모습을 찾아볼 수는 없고, 단지 커버 뒷면에 “그룹을 위해서 (For Our Benefit) 존 에반이 피아노와 올갠을 연주해 주었다.”라고 표기되어 있다.) [Stand Up]과는 매우 다른 이 앨범은 거의 모든 곡이 이언 앤더슨의 노래와 스타일로 구성되어있으며, 하드한 면이 엿보이던 1, 2집에다가 미학적인 머을 가미하여 한층 깔끔하고 다듬어진 음악을 들려주고 있다. 전 앨범 [Stand Up]에서 이언 앤더슨이 담당하던 건반 파트가 존에게 맡겨짐으로써 한층 풍부한 건반 연주를 들을 수 있으며, 이언 앤더슨 또한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게 되어 균형 잡힌 사운드를 들려주고 있다.

영국에서의 성공은 미국 진출의 첫 신호였다. 이 앨범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는 존 애반은 1년만 참여하기로 하고 투어에 참여하지만 그는 1년이 아니라 이 후에도 함께 활동하게 된다. 투어는 성공적이었고 이 앨범은 미국차트에 진출하여 11위를 마크한다. 이러한 성공에 고무된 그들은 일련의 유럽, 미국 투어에 나선다. 그리고 이를 통해 제스로 툴은 70년대 전체에 걸쳐 가장 풍부한 라이브 액트를 보여주는 그룹의 하나로서 기록된다.

앨범이 발표된 뒤 싱글 커트된 <Inside/Alive And Well And Living In>는 제스로 툴이 지금까지의 모든 싱글을 앨범 발표 이전에 냈다는 점에서 예외적인 것이었고, 이상하게도 이 싱글은 성공하지 못했다.

 

메시지 중심의 명작 [Aqualung]

cover_3349152292009.jpg 이언 앤더슨과 존 애반스(특히 이언 앤더슨)에게 있어서 제프리 하몬드-하몬드의 존재는 그룹내에서 함께 활동하지는 않았지만 항상 함께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67년 제프리가 자신들과 다른 길을 걷고 있는 동안에도 이들은 제프리를 위해 데뷔 앨범에서 <A Song For Jeffrey>, [Stand Up]에서는 <Jeffrey Goes To Leicester Square>, 세 번째 앨범에서 <For Michael Gollins, Jeffery And Me>라는 곡을 만들었으며, 결국 71년 4월 제스로 툴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Benefit] 발표 후 화려한 베이스트로 자리를 굳혀가던 글렌 코닉의 자신의 밴드 Wild Turkey를 결성하기 위해 탈퇴했기 때문이다.

71년 3월 명작 [Aqualung]이 발표된다. 이 앨범은 몇 개의 헤비록 트랙을 담고 있다. 이언에 의한 솔로로 곳곳에 조용한 어쿠스틱 사운드가 스며있다. 이언과 그의 부인 Jennie Anderson의 종교에 대한 철학을 노래화한 이 앨범에 대해 이언은 “Aqualung은 매우 초라한 사람으, 이 노래 속에서는 마치 외로운 방랑자처럼 아주 근본적으로 인용하였다.”라고 말한다. 좋지 못한 폐 때문에 Aqualung이라고 불리는 방랑자에 대한 이야기를 이언과 그의 부인 제니는 커버 뒷면에 이렇게 적고 있다.

“태초에 인간이 자신과 모습이 닮은 신을 만들었고 인간은 자신이 만들어낸 신에 대해 수많은 이름들을 부여했으며, 비로소 그 신들이 인간을 만족시켰을 때 온지구의 구세주로서 떠받들려졋다. 700만일이 되던 날, 인간은 죽어가면서 그의 신에게 크게 의지하게 되었고, 신을 믿게 되 사실에 대해 잘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인간은 지구의 폐물로서 자신과 같은 부류와 비교되는 이체물의 주역으로서 Aqualung이라는 방랑자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인간들은 이 초라한 방랑자를 허공 속으로 집어 던졌으며, 그들 중 몇몇은 화형을 당했고 몇몇은 인간들 사이에서 격리되어졌다. 인간은 자신이 창조해냈던 신으로 탈바꿈하고 기적과 함께 온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기적들이 일어났던 것처럼 그 원기는 인간 스스로가 창조했던 신을 모든 인간들 속에서 영유하게 했다. 그럼에도 인간은 끝내 신을 찾지 못했다. 어쨌든 인간은 신을 찾기 시작해야만 했다.”

평론가들은 “앨범의 대부분이 종교적인 테마,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반종교적인 테마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이 앨범을 Anti-Gold적인 것(신의 존재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으로 보는 사람들 사이에서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이 앨범은 반 종교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반 사회적인, 그래서 인간으로 하여금 보다 순수한 마음을 가질 것을 촉구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 앨범은 향후 몇년동안 그들의 라이브 쇼의 줄기가 되었다. 도시 구석진 곳에서 개와 함께 초라하게 앉아있는 Aqualung의 모습을 이언은 어쿠스틱 기타를 껴안고 어깨를 움츠리는 모습으로 공연장에서 재현하고 있다. 비록 앤더슨은 고의가 아니라도 부인하기 하지만 커버 사진은 초창기의 앤더슨의 모습과 많은 유사점을 보이고 있다. 우리들은 이 앨범 발표 이후에 열린 그들의 라이브 공연에서 타이틀 트랙이 항상 연주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곧 숨이 넘어갈 듯 거칠게 불어대는 이언의 플륫 연주와 종교적인 냄새가 풍기는 남성코러스가 신에 대한 경외심을 표현하고 있는 <My God>. 인생을 멈추지 않는 기차에 비유한 <Locomotive Breath> 역시 이 앨범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곡이다.

하지만 이 앨범으로부터는 앨범 발표시기가 촉박하다는 이유로 싱글 발표가 취소되었다. 71년 5월 Clive Bunker가 그룹을 떠나 로빈 트리우어, 프랭키 밀러와 Jude를 결성하고 그룹은 후임으로 John Evan's Smah 시절 함께 활동하던 Barriemore Barlow를 영입한다.

 

대곡에의 첫 시도 [Thick As A Brick]

cover_210172242009.jpg 멤버의 변경이 그룹의 음악적 방향성을 좌우하던 초창기와 달리 제스로 툴은 기존의 음악형태를 고수하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아트록적인 색채는 더욱 짙어져갔다. 이는 물론 모든 작업들이 이언 앤더슨의 손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라인업의 첫 앨범은 참으로 놀라운 작품이었다.

“SLAG(The Society For Literary Advancement And Gestation)는 문학 경진 대회 대상인 여덞살의 꼬마소년 Gerald (Little Milton) Bostock의 서사시 <Thick As A Brick>이 지난 월요일 밤 BBC 텔레비전에 소개된 후 빛발치는 항의와 위협 때문에 그의 수상을 박탈한다.고 어제 밝혔습니다.”

영국 유수의 신문사들이 주최하고 전국 각지의 7세부터 16세까지의 어린이들이 참가한 이 문학 경진대회에서 이 소년은 결국 수상은 커녕 네명의 저명한 소아정신과 의사들의 테스트를 받아야했고, 이들은 이 소년이 심각한 정신적 불균형과 함게 그의 작품이 인생, 신과 조국에 대해 극단적으로 불건전한 입장을 가진 것으로 판단했다. 결국 대산은 “He Died To Save Th Little Children"이라는 제목으로 크리스챤의 윤리에 대한 에세이를 쓴 12세의 소녀 Mary Whiteyard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천재소년 제를드 보스톡의 시는 그의 동네인 St. Cleve에서 발행되는 St. Cleve Chronicle 72년 1월 7일 금요일자에 톱 기사로 실리게 된다.

런던의 Chrysalis 레코드사의 한 담당자는 “우리는 천재소년 제럴드가 이룩한 문학적 발전을 높이 병가하고 그의 능력에 무한한 신뢰를 보낸다. 그리고 그가 우리 회사와 계약을 맺게 되었다는 사실에 자랑스러움을 느낀다.” 라고 말한다. 당시 미국 순회공연을 마치고 런던으로 돌아온 제스로 툴의 이언 앤더슨은 이 소년의 대서사시를 일고 감명을 받아 새로운 앨범의 타이틀을 [Thick As Brick]으로 결정하고 녹음에 들어간다. 또한 이 소년은 이언 앤더슨과 공동 작시가로서 참여하게 되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제스로 툴의 다섯 번째 앨범이 탄생한다.

이 앨범은 실제 St. Cleve Chronicle이 제럴드의 기사를 보도한 날짜의 신문을 그대로 앨범 커버로 사용하고 있어 또 하나의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아쉽게도 싱글커버로 제작되었다.) 총 12페이지로 구성된 이 날짜의 신문은 또한 제럴드 아이를 임신했다는 주장을 펴고 있는 14살 난 소녀에 대한 기사와 Chrysalis 레코드사가 Jethro Tull의 새 앨범 [Trick As A Brick]의 총 판매량에 대한 로얄티를 Bostock재단에 지불할 것이라는 것. 그리고 곧 발매될 Jethro Tull의 새 앨범에 대한 간단한 리뷰를 적어놓고 있다. (하지만 이 신문에 실린 기사들의 몇몇은 이언 앤더슨에 의해 쓰여진 것도 있다.)

음악 잡지에 흥미를 끄는 광고 캠페인을 전개하면서 72년 2월 발표된 이 앨범은 난해한 가사와 제스로 툴의 실험 정신이 만난 걸작이다. 역시 이언 앤더슨의 플륫과 함께 이전 앨범보다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존 애반스의 올갠 연주와 합시코드, 피아노 연주가 전체적으로 흐르면서 프로그레시브한 곡을 만들어내고 있다. 하지만 “하나의 테마에 하나의 곡”이라는 첫 시도에 따른 시행착오를 겪기도 해 테마와 테마를 연결시키고 있는 간주 부분의 어색함이 귀에 거슬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앨범은 아트록 매거진 독자들에게는 그 아트록적인 요소로 인해 다음 앨범 [A Passion Play]와 함께 최고의 선물이 될 것이다.

 

사운드의 완성 [A Passion Play]

cover_229172242009.jpg 72년 6월 컴필레이션 앨범 [Living In The Past]를 발표한 제스로 툴은 72년 말에서 73년 초에 파리에서 30개 이상의 작품을 녹음했지만 그 결과에는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영국으로 돌아와 [A Passion Play]를 다시 쓰고 녹음했다. 73년 7월에 발매된 이 앨범은 그해 3월의 콘서트에서 일부분이 연주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놀랍게도 짧은 시간안에 완성되었다. 하지만 서두른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놀라운 작품이었는데 음악적으로 가사적으로도 모두 그러했다.

죽음후의 선택이라는 어려운 주제를 담고 있는 이 앨범은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또한 앞 면의 끝에서 뒷 면 처음까지 연결되어 있는 한 편의 우화 <The Story Of The Hare Who Lost His Spectacles>가 인간의 생활에 있어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한 해결방시기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필자 개인적으로 제스로 툴 최고의 걸작이라고 평가하는 이 앨범은 전작과 비슷한 스타일로 구성된 곡이지만 그 짜임새와 멤버들의 조화된 역할이 그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뛰어남을 가지고 있다. 두 번의 시행착오는 잇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앨범에서 우리는 이언 앤더슨이 이미 지니고 있던 또 하나의 천재성을 발견하게 된다. “제스로 툴 = 이언 앤더슨의 플륫 연주”라고 생각하는 단편적인 생각을 단번에 없애버리는 그의 작곡, 편곡 능력이 이 앨범에서는 뛰어나게 발현되고 있다. 실제 이 앨범에서는 다른 앨범에 비해 플륫 연주가 적게 들어가 있고, 오히려 존 에반스의 건반 파트와 마틴 바의 기타 파트가 앨범 전체의 흐름을 이끌고 있다는 느낌이며, 특히 분위기에 따라 피아노와 키보드를 번갈아 가며 사용하고 있는 존은 앨범의 전체적인 조화에 많은 역할을 하고 있다.

앨범 발표되기 전에 열린 콘서트에서 제스로 툴은 [A Passion Play] 전체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LP, 필름, 테잎보다 기술적으로 더욱 완벽했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은 그것에 매력을 느껴 압도되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들을 자신이 받아 들이기에는 너무 어렵다고 생각했다. 콘서트와 앨범은 거의 모든 비평가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또한 전 앨범 [Thick As A Brick]에서부터 이언 앤더슨의 사상에 의심을 품기 시작한 평론가들은 [A Passion Play]를 “이언 앤더슨의 자기 아집적이고, 자기 중심적이며, 자신이 마치 종교를 초월해 있다고 생각하는 고집불통에서 나온 소산물”이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그들은 제스로 툴이 “팬들이 더 이상 우리들의 연주를 즐기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다시는 라이브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했을 때 더욱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그 후 은퇴는 가상적인 것이었고 그 발표가 실수였다고 번복했을 때 그룹은 비평가들의 엄청난 비판에 시달려야 했다. 그것은 언론과의 이별을 뜻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와중에서 [A Passion Play]는 미구에서 1위를 차지한다.

 

짧은 곡들로의 회귀와 음악적 침체

cover_4510172242009.jpg 1974년에 제스로 툴은 다른 앨범과 필름을 만들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고 이를 위해 오케스트럴 악보가 쓰여지고 곡들이 부분적으로 녹음되었다. 그러나 필름은 경제적 뒷받침이 따라주지 않았기 때문에 취소되었고 오케스트럴 사운드트랙도 그러했다. 다행히 앨범은 살아남았고, [War Child]라는 이름으로 1974년 10월에 발매된다. 이와 함께 필름 [Warchild]가 만들어지고 있다고 발표되지만 이는 발표뿐이었고 앨범 역시 그 사운드트랙은 아니었다.

이 앨범은 그 동안의 [Thick As A Brick]이나 [A Passion Play]등의 긴 곡과는 반대로 개별적인 짧은 곡들로의 회귀였다. 그러나 그 주제에 있어서는 연속성을 지니고 있어서 [A Passion Play]에서 보여준 것들과 동일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몇몇 비평가들은 제스로 툴이 이전의 두 앨범의 지나친 대곡화에 따른 과도함에서 벗어나 올바른 방향성을 잡았다고 간주하고 있지만 오히려 제스로 툴의 전성기는 이 앨범부터 다시 하강곡선을 그리고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어진 월드 투어는 모든 곳에서 매진이었고, 투어에 동반되는 네 파트의 스트링 섹션은 이러한 성공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는 제스로 툴의 첫 번째 앨범부터 어레인지를 맡아주었던 David Palmer가 이전의 어느 때보다도 깊숙이 관여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결국 그는 76년에 정식으로 그룹의 일원이 된다. 앨범 [Warchild]는 영국에서 14위를 기록하는 부진을 면치 못했지만 미국에서 히트한 몇 개 안되는 앨범 중의 하나이다.

cover_5545152292009.jpg 1975년 여름 미국에서 시작된 투어와 함께 제스로 툴은 아홉 번째 앨범 [Minstrel In The Gallery]를 준비하고 잇엇고, 유럽으로 건너와 새로 구입한 스튜디오에서 녹음과 믹싱을 한다. 앤더슨의 프로듀스는 밴드의 음악에 놀라운 깊이를 더해 주었다. <One White Duck>의 아름다운 멜로디에서 <Black Satin Dancer>같은 폭풍우같이 몰아치는 음악까지, 옛날 생각이 났을까? 그룹은 뒷면에 16분이 넘는 대곡 <Baker St. Muse>를 담고 있다. 데이빗 파머의 지휘하에 이루어지고 있는 바이얼린, 첼로의 오케스트레이션이 이전 앨범들과는 다른 그룹의 차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네 개의 조곡으로 이루어져 있긴하지만 작품 사이의 연관성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앨범의 대중적 사운드에도 불구하고 이 앨범은 영국에서 저조한 성적을 올렸고, 싱글로 커트된 타이틀 트랙 <Minstrel In The Gallery>는 앨범에서 할수 있는 최악의 선택이었다.

76년 1월 [M.U. - The Best Of Jethro Tull Vol. One]가 발표된다. 76년 5월 [Too Old To Rock'n Roll: Too Young Too Die!]가 발표된다. 이 앨범은 새로운 유행에 굴복하기cover_5011172242009.jpg 를 거부하고, 유행이 한바퀴를 돌아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 자신이 그 유행을 만드는 사람이 되겠다는 생각을 가진 나이든 록커의 이야기에 관한 것이다. 게이트 폴드 쟈켓 안쪽의 스트립 카툰은 이 이야기의 의미를 잘 설명하기 위해 그려졌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당연하게도, 이러한 명백한 소재는 오히려 따분했고, 영감이 결여된 것이었다. 이언은 그의 복잡하고 애매한 스타일을 버리고 단순히 노래에 이야기를 담아 불렀다. 주인공 Ray Lomas는 또다른 이언 앤더슨이다. 음악 잡지에서 이것이 이언의 자서전적 작품이라고 말한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Aqualung에서 표현된 그의 ahmq과 이앨범에서 보여진 그의 모습 사이에는 71us과 76년의 5년이라는 갭이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필연적으로 사회와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에도 변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앨범은 Jeffery Hammond-Hammond가 떠난 후 (그는 이와 함께 음악활동을 중지하고 화가로 활동하고 있다.) 새로 가입한 Carmen의 베이스 주자 John Glascock의 데뷔작이기도 한데, 우정출연으로 Carmen의 여성 보컬리스트 Angela Allen이 두 곡에서 보컬에 참여해 주고 있으며, Steeleye Span의 Maddy Prior의 목소리를 타이틀 곡에서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앨범은 평범한 노래와 특색 없는 프로듀스로 호소력이 없는 앨범이 되고 말았고, 이어진 방송 출연에서도 이 앨범에서 선택한 곡을 가지고 참여하지만 실망만 자아내고 만다.

 

Folk Trilogy

1976년 초, 이언 앤더슨은 그해에 히트 곡을 만들어 “Top Of The Pops"에 cover_3843152292009.jpg참가하겠다고 큰소리 쳤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 <Ring Out The Solstice Bells>는 크리스마스를 축하하기 위해 만들어진 싱글이었는데, 그룹은 로드 스튜어트의 공백으로 생간 후반부의 몇 분을 메우기 위해 그 프로에 참석하게 되었다. 이 곡은 77년 1월에 발표된 앨범 [Songs From The Wood]에 수록된다. 이 앨범은 새로운 팬들을 확보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 좀 더 포크적인 음악을 들려주고 있다. 또한 데이빗 파머가 존 에반스와 함께 키보드를 담당하면서 qossem의 정식 멤버가 된다.

 이어진 콘서트 투어는 제스로 툴의 건재를 보여주었으나, 평소에 이언과 감정이 좋지 않았던 음악 비평가들에 대한 증가하는 강박관념은 청중과 cover_418172242009.jpg함께 하는 무대 위에서도 이어졌다. 이언은 그들을 비난했고 이러한 불필요한 행동은 더 큰 비난을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이 행동은 당시 정통록을 위협하고, 그러한 사운드를 움츠리게 만드는 펑크 록의 도래에 대한 반응으로 비춰지기도 했다.

[Repeat-The Best Of Jethro Tull Vol.2]가 77년 10월에 발매되었고 <Glory Row>라는 신곡을 담고 있다. 팬들은 두 번째 베스트 앨범에 그리 만족하지 않았고 이 LPㄴs 50위 안에도 진입하지 못했다.

78년 4월에 모든 면에서 [Songs From The Wood]를 따르고 있는 [Heaby Horses]가 발매되어 제스로 툴이 전원적인 포크를 지향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78년은 제스로 툴의 팬들에게는 즐거운 한 해였다. 영국에서cover_4230172242009.jpg 뿐 아니라 그 해 11월 뉴욕의 매디슨 스퀘어가든에서 전세계에 라이브로 중계된 쇼를 공연한다. BBC TV와 라디오는 이를 동시에 중계했다. 첫 라이브 앨범(물론 [Living In The Past]의 라이브 면을 제외하고) [Live-Bursting Out]이 9월에 발매된다.

79년 9월에 발표되는 [Stormwatch]는 [Songs From The Wood], [Heavy Horses]와 함께 제스로 툴의 포크 삼부작이라고 불려지고 있는 앨범이다. 하지만 이 앨범은 앨범의 수록 곡보다 오히려 데이빗 잭슨에 의해 그려진 커버가 더 관심을 껄었던 (뮤지션에게는 이것이 최대의 모욕이 될 수도 있다.) 앨범으로 팬들은 제스로 툴의 포크적인 경향이 너무 오래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국내에서 커다란 성공을 거둔 <Elegy>와 이언의 가장 뛰어난 어쿠스틱 곡중의 하나인 <Dun Ringill>이 수록되어 있다. 이 앨범의 베이스 파트의 대부분은 이언에 의해 연주되었는데 그 이유는 베이시스트 존 글래스콕이 레코딩 도중 매우 아팠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심장수술을 받는 도중 사망했다는 슬픈 소식을 접하게 된 것은 미국 투어가 끝나갈 무렵인 그해 말이었다. 결국 당시 막 해체된 Fairport Convention의 Dave Pegg(데이브 펙)이 존 글래스콕을 대신해 투어 기간동안 베이스를 연주해 주었고 결국 정식 멤버로서 그 자리를 메우게 된다.

 

이언 앤더슨의 솔로 앨범과 New Jethro Tull

80년, 이언 앤더슨은 솔로 앨범을 녹음하기를 원했고 그룹의 마틴 바와 데이브 펙의 도움을 받는 동시에 키보드와 바이올린에 Curved Air, Frank Zappa, Roxy Music, UK 등에서 활동하던 천재 키보디스트 Eddie Jobson을 기용하고, 그의 친구 Mark Craney를 드럼주자로 영입한다.

앨범이 발표될 무렵 Chrysalis는 이언에게 그 앨범이 제스로 툴의 새로운 앨범이 되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그는 동의 했고, 즉시 이 라인업은 제스로 툴의 새로운 구성원이 된다. 결과적으로 Barlow와 Evan, Palmer는 해고되는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들이 해고되었는지, 아니면 스스로 그룹을 탈퇴햇는지에 대한 논쟁이 불붙었고, 얼마동안 그들과 이언 사이에는 감정의 대립이 있었다. 어쨌든 분열의 진상이 어떤 것이든 80년 8월에 발표된 앨범 [A]는 기존의 제스로 툴의 앨범과는 다른 모양을 하고 있었다. 특히 에디 잡슨의 역할이 그러했다. 앨범은 조화되지 않은 어수선한 모습을 띠고 있고, 이는 또한 이언이 에디 잡슨에 대해 이전과 같은 신뢰감을 가지고 있지 못하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영국 팬들은 두 번의 영국공연에서 이 라인업을 볼수 있었을 뿐, 에디 잡슨은 솔로 활동을 위해 그룹을 떠나고, 85년 베를린 라이브에서 잠시 모습을 드러낸다.

대부분의 수퍼 그룹들이 그러하듯이 80년을 기점으로 그들의 음악적 성과는 눈에 띄게 줄어든다. 그러기에 청자들도 “80년대에 발표된 앨범”이라는 딱지가 붙으면 망설이게 된다. 하지만 가끔 이러한 안 좋은 전통을 깨고 멋진 앨범을 내놓는 아티스트들도 있다. 제스로 툴은 70년대 말부터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해 80년대에 들어와서는 커다란 변화 없는 비슷한 스타일의 음악을 들려주었고 이러한 경향은 패들을 식상하게 만들 수 밖에 없었다. 80년대에 특색 없는 앨범 [A]를 만들고 2년간의 긴 공백을 거치고 난 다음 발표된 앨범 [The Broadsword And The Beast]는 기다릴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었던 작품으로 그룹이 오랫동안 경험해온 모든 것을 잘 조화시킨 앨범이다. 드럼에 베테랑 Gerry Conway, 키보드에 Peter John Vettese가 가입하게 되는데, 특히 피터 존 베티즈는 새로 태어난 제스로 툴의 뛰어남을 보장해준 사람이었다. 과다하게 부과된 앤더슨의 작업량은 Paul Samwell-Smith가 프로듀서로 기용됨으로써 해결되었다. 이 앨범은 뛰어난 작품성에도 불구하고 영국에서 27위에 랭크되어 매우 저조한 성적에 머무는데, 이는 팬들이 이전의 몇 앨범을 통해 드러난 제스로 툴의 쇠퇴가 극복될 수 없고, 이미 전성기를 지났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음해 이언은 솔로앨범 [Walk Into Light]를 발표한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들의 기대와는 동떨어진 것이었고, 그 때까지 몇 년동안 제스로 툴의 앨범이 이언 앤더슨의 솔로 앨범과 다를 바 없었다는 점이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그러한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 이 앨범은 키보디스트 피터 존 베티즈와의 공동 작업으로, 이언 개인의 솔로 앨범이지만 오히려 제스로 툴의 앨범보다도 그의 역할이 축소되어 잇는 아이러니컬한 앨버이다. 이 앨범에서 싱글 <Fly By Night>이 싱클 커트되고 챠트에도 오른다.

 

이후(84년~현재)

제스로 툴은 84년에 [Under Wraps]를 발매하고 영국과 유럽 투어를 뒤따라 지행한다. 그런데 미국 투어기간 중 이언은 목구멍에 이상이 생기게 되고 규모가 축소되는 동시에 활동이 위축되게 된다. 85년 이후 제스로 툴은 [Original Master]라는 베스트 앨범을 발표한 후 Ian Andreson, Dave Pegg, Martin Barre, 이렇게 세명의 고정멤버를 중심으로 활동을 게속한다. 영국의 채널 4의 TV시리즈의 테마 곡을 데이빗 파머와 함께 만들기도 하고, Marillin의 공연에 출연하기도 한다. 87년에는 [Crest of A Knave] 89년에 [Rock Island], 91년에 라이브 앨범 [Live At Harmmersmith]와 블루스 뿌리로 되돌아 간 실망스런 앨범 [Catfish Rising]을 발표한다.

이언 앤더슨이라는 걸출한 인물을 보유하고 있는 제스로 툴의 음악은 80년대 초반 이후 그렇다할 사운드의 변화를 보여주지 못했다. 오랜 그룹활동으로 인한 창조력의 상실과 어느샌가 타성에 빠져든 생활이 그 중 커다란 요인일 것이다. 하지만 “제스로 툴의 80년대의 음악”에 대한 평가가 그들의 전체 음악경력에 대한 평가로 일반회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올바른 청자의 자세다. 이는 우리들로 하여금 제스로 툴이 이미 거쳐 왔던 70년대의 음악에 대한 올바른 자리매김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해주고, 90년대의 음악적 변화와 새로운 시도에 디핸 갈망을 표출하게끔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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