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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이태리 Rock 역사를 정리 요약해 오면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언어 전달이었다. 특집자료로 사용되어 왔었던 대부분의 자료들이 너무나도 생소한 이태리어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완벽하게 번역, 소화해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많은 시간과 비용 그리고 노력이 투자되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이유로 Italian Rock에 커다란 관심을 가져왔었던 가까운 일본이나 그외의 여러나라에서도 이와 같은 특집기사는 지금까지 꿈꾸지 못했었다. 아무튼, 4회 연재로써 이 특집기사를 마감하면서 이태리 Rock역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을 보충하고, 그 총괄적인 역사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Italian Progressive Rock(흔히 “Italian Rock”으로 언급되어지는)의 역사를 더듬어 보면, 그것이 얼마나 험준한 역사를 지니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미, 영국의 Rock을 보방하면서 시작되었고, 그것이 변형되면서 이태리 인들의 기질이 담긴 Rock이 생산될 때까지 10년간의 역사에 대한 것은 Art Rock창간호에 자세히 소개된바 있으나 1950년대 후반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배제되어 있어 이 지면을 통해 잠시 그 당시의 이태리 레코드시장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이태리에 Rock’n Roll이 상륙한 것은 1956년의 일이었다. 세계 음악시장을 강타한 젊은이들의 우상 Elvis Presley의 음반들과 함게 이태리에 처음 등장한 Rock’n Roll은 이태리시장에서는 약 2년동안 그 위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그러나 1958년, 45RPM Single(EP)의 등장과 Juke Box의 다량보급으로 Rock’n Roll은 뒤늦게 이태리에서 붐을 맞는다. 하지만, 미국, 영국에서 일어났던 여러가지 사회, 문화적 사건들과 비교해 보면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은 셈이다. 그만큼, 이태리인들은 서서히 조용하게 수동적으로 새로운 젊은 문화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태리에서는 이 기간동안 불투명한 사회, 문화적인 양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당시, 이태리의 깐소네는 방황기를 맞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두가지의 형태로 분리되기 시작했다. 그 하나가 문화적인 전통과 악기를 사용하는 보컬 위주의 깐소네(전통에 반대되는 일을 하면서도 현실주의에 입각한 많은 부분을 추구했다고 마랄 수 있다)로써 대부분 무대 뒤에 대규모의 오케스트라를 동반했다. 또다른 하나는 현실주의에 부응하는 십대들 층을 겨냥한 싱어송라이터의 등장이다. 이 부류에 호응했던 젊은이들은 Rock’n Roll에 무조건 열광하는 젊은이들에 대항하는 또다른 젊은세대로써 뚜렷한 주제와 언어를 내세우는 이를 테면 지성적인 부류였다. 당시, 기하급수적으로 확장되는 음악시장도 이 두부류의 음악층을 겨낭하게 되었고 이것은 곧 상업성과 직결되었다.
그 이전 해까지 (1957년까지) 성공을 거둔 노래들은 대부분잉 번악 곡들이었고 1958년을 기점으로 노래들이 독특한 아티스트들의 개성과 직결되는 경향을 띠기 시작햇다. 또한, 레코드 발매에 있어서도 녹음방식의 혁신으로 새로운 시대를 맞고 있었다. 실질적으로 1958년 당시, 이태리의 레코드사들의 녹음 Studio는 15개로 늘어났고, 점점 증가되는 추세였다. 물론, Sanremo Festival의 성공이 음악시장을 크게 확장시켜 주었던 것도 사실이다.
한마디로 이태리 레코드 시장의 발전을 위한 주요한 해는 1958년이었다. 1958년쯤이 되어서야 결정적이고 확실한 일련의 음악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음악들은 Nilla Pizzi, Claudio Villa, Luciano Tajoli등에 의해 등장한 소위 이태리 인들의 기질이 담긴 음악들이었다. 그들은 당시 십대들이 사용하는 악기로서 노래들을 만들었다. 요컨대, 음악시장의 특이한 3가지 형태의 커다란 흐름을 정해놓았다. 첫째로 천천히 진행되긴 했지만 더 강하고 확실한 변화는 싱어송라이터들의 등장이었다. Domenico Modugno는 ‘Nel Blu, Dipinto di Blu’라는 곡으로 산레모 가요제에서 우승을 했고 그의 음악은 소위 제노바풍의 노래로 분류되었다. 그와 함께 Paoli, Bindi, Tenco등이 음반시장에 등장하게 된다. 그들은 그들은 그 동안 음악에 등을 돌리고 있었던 지식인들에게 흥미를 느끼게하는 그들 자체가 지식인들에게 흥미를 느끼게하는 그들 자체가 지식인들이었다. 두번째로, 절규조로 노래하는 가수들, Toni Dallara, Betty Curtis, Joe Sentieri등의 갑작스러운 등장과 뜻하지 않았던 성공이다. 이들 가수들은 미국, 영국으로부터 불어온 새로운 록을 모델로 받아들여 좀더 느린 템포로 변화시켰다. 세번째로,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지만 밀라노 출신 록커들의 탄생이다. 그들의 음악들은 풍자를 바탕으로 전개되었고 이들의 첫 출현이 세인들의 관심을 끌게 했다. Giorgio Gaber, Enzo Jannacci, Adriano Celentano와 Chigo등의 밀라노의 Rocker들이 1958년에 데뷔했다.
역시, Italian Rock 역사에 있어서 1958년은 획기적인 한해였다. 음반 판매량을 보아도 이 사실이 쉽게 입증된다. 1957년, 이태리 국내의 총 음반 판매량은 11,940,700이었는데 비해 1958년에는 16,875,200눈에 띄게 증가했다. 41%의 음반판매 증가율은 한마디로 경이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음반시장의 혁신에 가장 커다란 힘을 작용시킨 요인은 녹음 Studio에 대한 레코드회사의 정책 변화 때문이었다. Milano를 근거지로 하는 레코드사 Ricordi가 새로 생겨났으며 150번째의 음반발매를 기념하여 레코드 녹음실에 모인 대표자 Nanni Ricordi와 Franco Crepax는 다른 레코드사들이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던 새로운 음악을 추구하는 변화를 추진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제노바 출신의 많은 싱어송라이터와 그룹들이 활동하기 시작한다. 여기에 밀라노 출신의 록커들 Jannacci와 Giaber, 그리고 Omella Vanoni등도 합류하게 된다. 1958년에는 Adriano Celentano외에도 Mina가 Baby Cate라는 가명을 내세워 데뷔한다.
미국은 이태리 음악시장이 커질 것이라는 것을 예측하고 체계적이고 치밀한 방법으로 이태리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이미 기반을 닦아 왔었다. 1953년에 RCA가 Roma에 이태리 지사를 열면서 아무런 잡음 없이 살며시 들어왔고, 1950년대가 막을 내릴 때까지 조심스럽게 음악시장을 지켜보고 있다. 1960년대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싱어송라이터들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 이태리 음악계는 모방의 시대 즉 Cover Version의 시대를 맞는다. 이때가 미,영국의 음악만이 환대 받는 이 태리 음악계의 어두운 암흑기였다. 1960년대 중반, 독창성이 배제된 모방의 시대를 거쳐 Beat 시대가 도래한다. Beat계의 우연한 성공으로 이태리 음악계는 상업적으로 커다란 힘을 얻었지만, Beat역시 Cover시대의 연장일 뿐 그들의 독창성은 역시 배제되어 있었다. Beat의 시대는 너무나 짧았고, 1960년대말 Beat의 열기가 가라 앉자마자 젊은 뮤지션들의 “우리들의 음악찾기”라는 “노래의 혁명”이 일어난다. 결국 방송가와 극장가 그리고 레코드업계의 편견을 꺽어보려는 젊은 뮤지션들의 운동은 정치와 Rock문화가 융화되는 장을 마련하게 된다. 이태리의 좌익계열은 이러한 젊은이들을 최대로 이용하려 했었고 이것으로부터 미국의 Woodstock Festival을 모델로 삼은 수많은 옥외 Festival의 개최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Festival을 발판으로 수많은 이태리 Rock그룹들이 데뷔했고, 음반을 녹음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최초의 이태리 Rock Festival은 로마에서 개최되었던 “Caracalla”이며 가장 유명했었던 Festival은 Latte E Miele가 무대 데뷔했었던 Villa Pamphilli(1972)이다.
다행스럽게도, 수많은 Festival을 통해 음악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그룹들은 1960년대의 그룹들이 지니지 못했었던 독창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의 음악은 미, 영국의 Rock음악에 뿌리를 두고있으면서도 이태리 특유의 향기를 가득 담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Italian Progressive Rock이었던 것이다.
1970년대초, Italian Rock + Italian Progressive Rock의 수식이 성립될 정도로 대부분의 Rock그룹들이 실험정신과 창조력에 불타고 있었고, 수많은 Festival이 그들의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장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Mass Media는 여전히 그들을 냉대했으며, 그들 중에 행운아들만이 레코드사로부터 음반을 발표할 수 있었다. 두차례에 거러쳐 소개되었던 Festival에 관한 기사들은 이 당시의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위에서 잠시 언급되었던 수식처럼, Italian Rock의 역사를 Italian Progressive Rock으로 간주한다면 그 역사는 매우 짧다. 그 역사는 최초의 Concept앨범을 내놓았던 New Trolls에 의해 시작되어 Progressive Rock의 마지막 유산으로 기록되는 Locanda Della Fate의 유일한 앨범으로 끝이났다라고 말할 수 있다. 즉, 그 역사는 1969년부터 1977년까지를 의미한다. 그 이전의 Beat시대와 그 이후의 신세대 시대는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약 9년간의 이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다.
그럼, Italian Rock의 그 중요한 약 9년간의 역사를 살펴보도록 하자.
Italian Rock의 가장 중대한 시기(1069~1970)는 연대별로 크게 5부분으로 나누어진다. 그 첫번째 시기는 1969년 초부터 1970년 초까지로 Beat그룹들이 Progressive Rock그룹을 변신하는 기간이었다. 즉, 이 기간은 Italian Progressive Rock의 탄생기인 것이다. 이 당시의 선두그룹들은 후에 Super Group으로 성장되는 New Trolls, Le Orme 그리고 Quelli(P.F.M.의 전신그룹)등이 있었다.
두번째 시기는 이태리 인들의 기질과 독특한 개성을 지닌 그룹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시기로 1970년도 중반부터 그들의 활약이 두드러지기 시작한다. 이들의 음악은 이전의 음악들과 비교해서 보다 복잡하고 다양한 양상을 띠고 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그룹들은 Il Balletto Di Bronzo, Formula 3, Trip등이었다.
세번째로 분류되는 기간 1971년부터 1973년까지는 Italian Progressive Rock의 황금기로 수많은 작품들을 남기고 사라져버렸던 가장 빛나는 시기이다. 이 기간동안 가장 많은 Festival과 Concert가 개최되었으며, 레코드 발매량과 그 질에 있어서도 최고를 기록했던 기간이었다. 지금까지 명반과 걸작으로 손꼽히는 대부분의 작품들이 이 기간에 생산된 것들임을 생각할 때 이 시기가 얼마나 중요한 시기였던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 시기가 또다른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면 이때부터 Italian Rock이 세계시장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P.F.M.이 영국과 미대륙 그리고 일본까지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Le Orme와 Banco도 외국시장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항상 미, 영국의 Rock 음악만을 수입해 왔었던 이태리에서 Rock의 역수출은 커다란 의미를 부여해주었다.
그러나, 양과 질적으로 그들의 Rock음악이 미, 영국과 겨룰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해주었던 반면 여전히 본국 이태리에서는 방송매체가 무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당시, 대활약했었던 그룹들은 Latte E Miele, Nuova Idea, J.E.T., Osanna, Reale Accademia Di Musica, Il Rovescio Della Medaglia, Garybaldi, Jumbo, N.T. Atomic System, metamorfosi, Quella Vecchia Locanda, Alphataurus, Circus 2000 등등이다. 이 당시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각 그룹들의 주요멤버들의 개성이 크게 돌출되고 있다는 것이다. 괴상한 행동과 언동으로 청중을 매료시켰던 Osanna의 취주악기주자 Elio D’anna, 예수의 모습을 하고 등장한 Metamorfosi의 플륫주자이며 보컬리스트인 금발 Davide “Jimmy” Spitaleri, 그리스 출신으로 이태리에서 성공한 개성파 보컬리스트 Area의 Demetrio Stratos 등이 대표적인 개성 파들이었다. 또한, 훌륭한 Guitarist로써 Alberto Radius (Formula 3 – Il Volo)와 Nico Di Palo(New Trolls)를 탁월한 키보드주자로써 Joe Vescovi(Trip)와 Gianni Leone(Leo Nero – Il Balleto Di Bronzo)를 뛰어난 드러머로 Franz Di Cioccio(PFM)와 Nunzio Fava “Cucciolo”(Osage Tribe) 그리고 베이스 주자로 Bob Callero(Osage Tribe)와 Patrick Dijivas(PFM)를 다중악기 주자로써 Mauro Pagani(PFM)를 손꼽을 수 있다.
네번째 시기는 1974년부터 1976년까지의 시기로 수퍼그룹들이 분열되거나, 기존의 그룹들이 해산되어 탄생한 제2세대 그룹들의 활동시기이다. 1973년, 극치를 이루었던 Progressive Rock의 열풍이 서서히 가라앉은 시대이다. New Trolls의 분열로 생겨난 Ibis, Formula 3의 후신 그룹으로 탄생한 Il Volo, Garbaldi의 분신으로 탄생한 Bambibanda E Melodie등이 활약했고 Biglietto Per L’Inferno, Maxophone등과 같은 실력이 뛰어난 신진 그룹들도 상당수 눈에 띤다. 특히, 밀라노 출신의 6인조 그룹 Maxophone는 이태리 Progressive Rock의 황금기인 1973년에 결성되어 Banco와 Rocky’s Filj, Edoardo Bennato의 제작자로 알려진 Sandro colombini에 의해 발탁될 때까지 2년이라는 세월을 헛되어 보냈지만, 결국, 이태리 Rock역사에 영원히 남을 유일한 앨범을 5개월만에 완성했다. 그들의 유일한 앨범은 1975년에 발표되어 서서히 숨을 거두어 가고 있는 Italian Rock의 맥을 간신히 이어주었다.
다섯번째 시기는 1977년으로 까지 연장시켜 주었던 그룹은 바로 Locanda Delle Fate였다. 피에몬테 출신의 7인조 그룹은 원래 3인조로 출발, 3명의 멤버를 보충한후 새로운 보컬을 맞이하여 7인조라는 대규모의 그룹이 되었다. 이 그룹이 행운을 얻게 된 것은 그리스의 천재 뮤지션 Vangelis의 친형인 Niko Papathanassiou와의 만남이었다. Niko는 음반제작자로 활약하고 있었고 Locanda Delle Fate를 유망주로 발탁하여 Polydor로부터 음반제작을 의뢰, 역사에 남을 명반을 탄생시기게 된 것이다.
Locanda Delle Fate의 유일한 앨범 “Forse Le Lucciole Non Si Amano Piu(반딧불은 아마도 더 이상 서로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는 Italian Rock을 빛내주었던 마지막 반딧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