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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36
마음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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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수 : 26685
2010.03.23 (16:43:12)
ARTIST:  Procol Harum 
COUNTRY:  U.K. 
GENRE:  Crossover Prog 
ALBUM:  Procol Harum (1967)
Shine On Brightly (1968)
A Salty Dog (1969)
Home (1970)
Broken Barricades (1971)
Grand Hotel (1973)
Exotic Birds And FRuit (1974)
Procol's Ninth (1975)
Something Magic (1977)
Prodigal Strager (1991)
The Long Goodbye (1995)
The Well's On Fire (2003) 
MEMBER:  Gary Brooker (vocals, piano)
Keith Reid (words)
Barrie James "B.J." Wilson (drums, 1967-90)
Matthew Fisher (organ, 1967-69, 1991-2004)
Robin Trower (guitar, 1967-71, 1991)
David Knights (bass, 1967-69)
Ray Royer (guitar, 1967)
Bobby Harrison (drums, 1967),
Chris Copping (bass, organ, 1969-77)
Alan Cartwright (bass, 1971-76)
Dave Ball (guitar, 1971-72)
Mick Grabham (guitar, 1972-77)
Pete Solley (keyboards, 1976-77) 
원본출처:   

Procol Harum

Gary Brooker는 멜로디 메이커의 광고란에 “올갠 주자가 일자리를 구함... 또한 기타리스트를 원함”이라는 광고를 Procol_20Harum.jpg 내었으나 아무도 그를 찾지 않았다. 그러던 중 어느날 밤 Gary를 비롯, 후에 Procol Harum을 결성하게 될 젊은이들은 그날 밤으로부터 일주일 후 워털루 역에서 모두 만나게 되리라는 믿을 수 없는 꿈을 꾸게 된다. Procol Harum의 결성동기를 묻는 질문에 대해 멤버들이 대답한 내용이다. 어찌보면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 이 믿을 수 없는 꿈에 대한 이야기에서부터 Procol Harum의 역사는 시작된다. 그들은 그 무엇보다도 열정 하나로만 모였다. Gary와 작시가 Keith를 제외하곤 모두 무명의 경험이 없는 이방인들이었던 당시의 멤버들은 모두다 아무에게도 의지할 데 없는 자력으로 일어서야만 했던 자립심 강한 젊은이들이었다. 그들은 경력은 유리창 청소원, 그리고 커피숍의 매니저들이었다. 하지만 비트 시대를 마감하는 67년에 발표된 <A Whiter Shade Of Pale>과 68년에 만들어진 <In Held Twas In>에서 그들이 들려준 록과 클래식의 웅장한 만남의 소리는 전세계 음악 팬들을 흥분 속에 젖어들게 하였고, 후대 음악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전신 Paramounts의 결성과 변화

Procol Harum의 역사는 59년 영국의 Southend로 거슬러 올라간다. Gary Brooker, Robin Trower, Chris Copping이라는 3명의 소년이 그 지역의 음악 경연대회 참가 후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그들은 곧 그룹 결성을 결정하고, 61년에는 자신들이 연주하던 댄스 paramounts.jpg 홀의 매니저로부터 Paramounts라는 이름을 부여받음과 동시에 2명의 멤버를 추가로 영입한다.

창립 멤버 격인 Gary Brooker, Robin Trower, Chris Copping이 각각 키보드, 기타, 베이스를 맡아 주었고, 보컬을 Bob Scott, 드럼을 Mick Brownlee가 담당해 주었다. 그들은 당시의 여러 그룹들처럼 엘비스 프레슬리, Gene Vicent, Fats domino등의 곡들을 연주했다. 하지만 밥스코트가 도중하차하게 되고 보컬 파트에 공백이 생기자 멤버들은 피아노를 담당하던 게리에게 보컬을 맡긴다. 그의 보컬솜씬느 생각보다 자연스러웟고 이후로도 그는 계속 이 역할을 수행한다.

어느정도 안정된 틀을 갖추게 된 Paramounts는 제리 리 루이스, The Shadows등과 함께 “Rock Across The Channel"연주에 참여하기도 했다. 또한 블루스 음반을 다량 소유한 Tony Wilkinson이라는 컬렉터는 그들에게 리믐 앤 블루스와 소울을 소개했고, 그룹은 레이 찰스와 제임스 브라운등의 음악을 레파토리로 삼을 수 있었다. 바를 운영하던 로빈 트라우어의 아버지의 도움으로 Paramounts는 그 곳에서 R&B를 연주하며 경력과 실력을 쌓을 수 있었다.

하지만 대중적인 인기를 수반하지 못한 이는 주머니 사정하고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 그룹활동을 멤버의 변화없이 지속적으로 이어가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앨범 한 장 발표하지 못하고 단명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져간 그룹이 얼마나 많은가? 비록 멤버의 변화는 있지만 그래도 끈기를 가지고 그룹활동을 계속했다는 사실에서 그들의 성공의 단면을 살펴볼 수 있을 뿐이다.

Pramounts는 “자신감”과 “음악에 대한 열정”이라는 정신적 메리트를 기반으로 63년에 프로로 전향할 것을 결정했지만 이과정에서도 역시 멤버의 변화가 있었다. Mick Brownlee의 탈퇴로 공석이 된 드러머를 채용하기 위해 멜로디 메이커에 광고를 내서, 15살의 소년 B.J. Wilson을 채용한다. 또한 공부를 위해 그룹 탈퇴를 결정한 Chris Copping의 뒤를 Diz Derrick이 메우게 된다.

그룹의 매니저인 Peter Martin은 미국의 R&B 그룹 Carsters의 <Poison Ivy>, <Further On Up The Road>등을 데모테입으로 제작할 것을 권유한다. 그룹은 다른 아티스트의 커버 버전을 부른다는 것자체에 대해 커다란 모욕으로 생각했지만 그들은 이미 아마추어가 아니었고, 이는 곧 구속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할수 있는 것이라곤 단지 Parlophone과의 계약 사항을 충실히 이행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성과는 괜찮아서 64년 1월에 발매된 그룹의 첫 싱글 <Poison Ivy>는 게리의 강하고, 소울풀한 목소리와 함께 독특한 피아노 솜씨가 유감없이 발휘되었고, 나머지 멤버들의 백업 역시 주목을 받았다. 이작품은 Hollies와 함께 일했던 Ron Richards의 프로듀스로 만들어 졌으며 Paramounts의 유일한 차트 성공작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영국에서 가장 뛰어난 R&B 그룹이라고 평한다. 하지만 연속된 커버 버전 작업은 실패로 돌아가고, 특히 <Poison Ivy>의 성공을 재현하기 위해 만든 Coasters의 곡 <Bad Blood>는 V.D(성병)의 슬랭이라는 이유로 BBC에 의해 금지 곡이 되는 우여곡절도 겪는다.

 

Paramounts의 해산과 Keith Reid와의 만남

Paramounts의 해산과 Keith Reid와의 만남

결국 Paramounts는 해산의 위기를 맞게 된다. 이를 조금이나마 극복하기 위해 65년에는 리듬 앤 블루스에서 컨츄리 풍으로 스타일을 바꿔보려 했지만 이는 최악의 선택이었다. 그해 말, 그들의 뿌리인 리듬 앤 블루스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그래서 멤버들도 싫어한 싱글 <You've Never Heard It So Good>을 발매한다. 이 싱글에 대해 Gary는 “You've Neverkeith.jpg Heard It So Bad"라고 말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룹은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고, Paramounts는 Palophone 레이블의 다른 아티스트들의 백밴 드 역할밖에 하지 못하게 딘다. Gary는 자신들이 다른 아티스트의 백밴드로서 전락하는 이러한 상황에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고, 마침 이 시기에 영국을 정기적으로 드나들던 Otis Redding이, Paramounts가 주로 하던 커버버전을 더욱 잘 소화해내는 것을 보고 활동방향을 바꾸기로 결심한다. 커버버전의 한계를 느끼게 된 것이다. 그는 자신들이 직접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아티스트들에게 곡을 써서 주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Gary는 이 때 후의 Procol Harum의 성공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되는 한명의 인물을 만나게 된다. 그때의 상황에 대해 Gary는 이렇게 말한다. “아마 66년 초였을 거에요. 그때까지만해도 Paramounts는 활동 중이었죠. 우리는 Guy Stevens(전설적인 프로듀서이자 DJ로 후에 그룹 Clssh의 프로듀서를 활동)의 집 근처에 있었는데, 어느 날 우리들에게 Keith Reid를 소개했습니다. Keith는 시(가사)가 적혀있는 커다란 종이묶음을 우리에게 건네주었죠. 나는 별로 관심이 없었기에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몇주 후에 Paramounts가 해산되었을 때 문득 그 봉투가 생각이 났습니다. 거기다 곡을 붙엿죠. 우연의 일치일까요? 그 다음 날 Keith로부터 편지가 왔는데, 거기에 내가 그 전날 곡을 붙인 바로 그 시가 인용되어 있었습니다. 그에게 즉시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 곡은 나중에 Procol Harum의 데뷔앨범에 실리게 되는 <Somethin Following Me>이다. Gary는 Keith와 함께 곡을 만들어 다른 아티스트에게 주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노래를 불러줄 사람들을 찾는 것 또한 쉽지 않았고, Keith Reid와 함게 Pinewoods라는 그룹을 결성해보기도 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이제 마지막 선택만이 남았을 뿐이다. 게리는 자신이 직접 노래하기로 마음을 바꾼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최후의 방편이 최선의 방편이 된 셈이다.

 

Procol Harum의 결성

Pinewoods의 발전적인 해체를 결정한 Gary와 keith는 불후의 명곡 <A Whiter Shade Of Pale>을 비롯한 몇 개의 새로운 곡을 만들고, 새로운 멤버들을 구하기 위해 Melody Maker에 광고를 낸다. Guy Stevens의 고양이의 이름인 Procol Harum(원래는 Procul Harum으로, 이는 라틴어로 “현세와 동떨어진”(Far From These Things)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을 따라서 그룹명도 변경한다.

Gary가 음악계에 문을 두드리기 시작한지 꼭 9년만의 일이다. 67년 4월에 Procol Harum을 이끌어 나갈 멤버들이 결정된다. Gary와 Keith를 비롯하여 올갠에 Matthew Fisher, 베이스에 Dave Knights, 기타에 Ray Royer, 드럼에 Bobby Harrison으로 Matthew는 이미 음악활동을 하고 있었고, Bobby는 파라마운트의 작업을 도와준 적이 있었다.

Procol Harum은 당시로서는 매우 독특한 사운드를 들려주었고, 이는 물론 Gary, Guy Stevens와 그룹에서 작시만을 담당하던 Keith의 의식적인 노력의 결과였다. Gary는 분위기의 쇄신을 위해 하몬드 올갠을 도입했고, Paramounts 시절의 유산인 블루지한 분위기를 위해 기타를 도입했다. Procol Harum은 여러 가지 면에서 록음악에 획을 그은 그룹이다. 먼저, 작시만을 담당하는 정식멤버를 둔 것이다. 두 번째, 게리와 키스는 보다 충만한 사운드를 위해서 올갠과 피아노를 완전한 분리해서 역할을 담당하도록 결정했다.(Gary가 피아노를, Matthew가 올갠을 담당한다.) 또한 어떤 악기도 독자적으로 사용될 수 없었다. 이러한 새로운 모습으로 Procol Harum은 탄생하게 된다.

 

대망의 데뷔 앨범 A Whiter Shade of Pale

pale_retail_cd-front.jpg Procol Harum의 첫 싱글 <A Whiter Shade Of Pale/Lime Street Blues>가 67년 5월에 발매되어 전세계적인 히트를 기록한다. 레이 챨스로부터 받은 블루스적 영감을 바하의 G선상의 아리아에서 접목시킨 방법론은 대중에게 커다란 호응를 얻었고, 평론가들은 중세적인 분위기가 풍긴다는 말로 자신들이 받은 충격을 표현할 뿐이었다. Procol Harum의 이러한 시도는 음악을 구분 지으려는 것에 대항하는 것이었다. 놀라운 올갠 솜씨와 Keith Reid의 초현실적인 작시는 뜨거운 여름을 뒤덮을 만한 “더욱 흰 그늘”이었다.

이 곡은 Paramounts 시절에는 상상도 못했을 60만장의 판매고를 올렸고 록 역사상 불후의 곡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그들의 불운은 갑작스런 성공이라는 동전 앞면의 반대편에 이미 자리잡고 있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싱글은 Procol Harum에게는 보상보다는 골칫거리를 가져다 주었다.

그들은 이러한 갑작스런 성공을 맞이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고 투어를 할 준비도 되어있지 않았다. 또 세션 드러머 Bill Harrison이 <A Whiter Shade of Pale>에서 자신이 드럼을 연주했고, 정규멤버인 Bobby Harrison은 뒷면만을 연주했다고 폭로했다. 이는 일종의 도덕성이 시비를 불러일으킬 소지를 안고 있는 것이었다. 결국 사건의 당사자 Bobby와 기타리스트 Ray가 그룹을 등지게 되고 Gary의 옛 친구이자 Paramounts 시절의 동료였던 Robin Trower와 B.J. Wilson이 다시 합류한다.

67년 9월, Procol Harum은 Regal Zonophone으로 이적하고 두 번째 싱글 <Homburg/Good Captain Clack>을 발매한다. 모노로 녹음된 <Homburg>는 초창기 Procol Harum의 고전 음악 연습곡이라 할 수 있는데, <A Whiter Shade Of Pale>과 비슷한 형태의 곡으로 어떤 비평가는 이 곡을 “A Paler Shade Of White"라고 비꼬기도 햇지만, 커다란 인기를 얻는다.

두 장의 싱글의 발표로 자신들의 음악적 방향성에 대한 자신과 정규 앨범 발매에 자신감을 갖게 된 Procol Harum은 여러 가지 우여곡절과 고난의 연속 속에서 드디러 데뷔 앨범 [A Whiter Shade Of Pale]을 68년 1월에 발매한다.

전체적으로 60년대를 풍미한 사이키델릭과 거리를 두면서 블루스와 소울 풍의 곡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이 앨범은 애초의 기치로 내걸었던 피아노와 올갠의 분리가 실현되고 있으며, Matthew에 의해 쓰여진 연주곡 이외의 모든 트랙은 Gary와 Keith에 의해 쓰여졌고, 키스의 작시는 밥 딜런과 자신의 신비주의적 경향이 잘 결합된 것이었다. 최고의 히트곡인 타이틀 트랙을 비롯해 그들이 평소 고집해온 리듬 앤 블루스를 기초로 하면서 록과 클래식에서 영향을 받은 곡 <Conquistador>와 <She Wandered Through The Garden Fence>가 그 뒤를 잇고 있다.

Gary와 keith가 함께 만든 최초의 곡인 <Somthing Following Me>에서는 끈적함이 배ㅐ어있는 기타와 피아노, 그에 어울리는 게리의 목소리가 정겹다. 한 편의 쇼를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재미있는 곡<Mabel>과 <Good Gaptain Clack>, 마녀와 마왕이 만나 여는 잔치를 의미하는 Walpurgis를 소재로 만든 연주곡으로 타이틀 트랙과 비슷한 방법으로 전개되지만 종반부의 하드한 분위기가 멋진 <Repent Walpurgis>는 마치 마녀 피아노, 드럼이 마왕 일렉트릭 기타와 만나 향연을 벌이고 있는 것 같다.

 

본격적인 프로그레시브 록 Shine On Brightly

Shin_On_Brightly_cd-front.jpg Procol Harum은 영국에서의 실패와 미국에서의 성공ㅇ르 동시에 맛본다. 68년 4월에 발표된 3번째 싱글은 겨우 챠트 50위에 랭크되는 부진을 면치 못한다. 하지만 그 해 10월 미국의 Filmore East공연에 참가한 이들은 가장 적은 보수를 받으면서도 자신들이 머물렀던 6개월 동안 가장 돋보이는 공연을 보여주었다.

68년 12월, 영국에서의 인기 하락과 미국에서의 인기 부상의 과정에서 그들의 최고 걸작 앨범 [Shine On Brightly]가 발매된다. 블루스하고 소울풀한 모양새를 벗어버리고 본격적인 프로그레시브 록을 들려주고 있는 전환기적 앨범으로 <Skip Softly(My Moonbeams)>, <Sihne On Brightly>를 비롯하여 Procol Harum의 가장 아름다운 곡으로 행진곡풍의 드러밍과 달콤함을 가득 담은 <Maglalene>같은 뛰어난 트랙을 담고 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작품은 거의 한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In Held Twas In I>이다. 레이챨스 스타일의 블루스 창법을 들려주고 있는 Gary의 보컬을 더욱 호소력 잇게 다가오고 있으며, keith의 시적 영상은 서정적인 동시에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세계로 확장되었다.

여기다 Cream 당시의 Eric Clapton의 연주를 연상케하는 Robin Trower의 기타와 Matthew의 장중하고 정교한 올갠 연주가 그 빛을 발하고 있다. 다음 해인 69년에 발표된 비틀즈의 <Abby Road>처럼 5개의 조곡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곡은 테잎을 걲로 돌리는 방식이라든지, 윙윙거리는 시타소리, 울부짖는 듯한 피드백 등등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사이키델릭 시대의 산물이었다. 또한 도입부의 나레이션과 Grand Finale부분에서의 코러스의 도입은 한 편의 심포닉 록이다.

 

개개인의 특성이 잘 나타난 또 하나의 걸작 A Salty Dog

a_salty_dog_cd-front.jpg [Shine On Brightly]가 발표된지 채 일년도 안된 69년 6월, 뽀빠이 복장을 한 부르터를 연상케하는 그림을 커버로 하고 있는 [A Salty Dog]이 바다의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담겨있는 타이틀 트랙과 헤비메탈 <Long Gone Geek>을 뒷면으로 하는 싱글과 동시에 발표된다.

Matthew의 블루스 지향에서 탈피한 공격적이면서도 부드러운 보컬과 오케스트레이션 편곡과 함께 전개되는 전원적인 아름다운 멜로디가 담겨져 있는 이 앨범은 다른 앨범보다 그룹차원의 노력이 엿보이는 앨범으로 대부분이 Gary와 Keith의 작품으로 채워졌던 이전의 앨범과 달리 Matthew와 Robin이 각각 <Wreck of The Hesperus>와 <Crucifiction Lane>등 몇 개의 곡을 쓰고 리드보컬까지 담당하면서 자신들의 지향점을 보다 명료하게 표현하고 있다. (로빈의 블루스, 록 지향성과 매츄의 클래식 지향성) 또한 이 시기는 Robin의 자극적인 기타웍이 전면에 드러나기 시작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The Devil Came From Kansas>)이 앨범은 [Shine On Brightly] 앨범과는 매우 다른 스타일이지만 Procol Harum에게 가장 높은 상업적 성공을 가져다주었다. [Shine On Brightly]와 [A Salty Dog]. 이 두 장의 앨범으로 이제 Procol Harum은 영국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확고한 위치를 다질 수 있게 되었다.

[A Salty Dog] 발매후 Matthew와 Dave Knight이 탈퇴한다. 이미 [A Salty Dog]을 프로듀스한 경력이 있는 Matthew는 꿈을 버리지 못하고 프로덕션으로 간다. (그는 후에 3장의 솔로 앨범을 낸다.)

Dave는 어떻게 보면 그룹의 희생자인데 [A Salty Dog] 이후 달라진 그룹의 방향성에 걸맞지 않았게 때문에 Legend라는 그룹의 매니저로 간다. 이 두명의 공백을 메운 사람은 Paramounts의 멤버였던 베이스 실력과 올갠 연주력을 겸비한 Chris Copping이다. 그는 베이스와 올갠을 동시에 담당하게 되고, 이제 라인업은 keith를 제외한다면 62년 당시의 Paramounts와 같아지게 된다.

69년 가을 Procol Harum은 캐나다의 온타리오에서 열린 Stratford 페스티벌에서 자신들의 곡을 가지고 오케스트라와 연주하는 최초의 록 그룹이 된다. (69년에 발표된 Moody Blues의 [Days Of Future Passed]는 무디 블루스의 런던 심포니가 따로따로 연주한 것을 오버더빙한 것이다.) 이는 [A Salty Dog]이 클래시컬하게 어레인지되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Gary가 느낀 감흥과는 정반대로 Robin은 그것을 매우 싫어했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일과 달리 오케스트레이션을 위해 조용히 연주해야했기 때문이다.

 

Paramounts로의 회귀 Home과 최악의 작품 Broken Barricades

home_retail_cd-front.jpg 어쨌든 Paramounts와 같은 라인업으로 출발한 것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네 번째 앨범 [Home]이 70년 7월 발매된다. 2집과 3집에서 들려주었던클래시컬한 편곡과는 달리 이 앨범은 평범한 리듬 앤 블루스로 채워져 있다. 그룹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던 Matthew의 올갠이 재즈 지향적인 Chris Copping으로 바뀌었다는 점은 곧 음악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Matthew가 떠난 Procol Harum의 사운드는 키보드보다 기타에 지배받고 있으며, 이는 <Whisky Train>같은 미국에서의 히트곡을 양산해 낸다. 하지만 [Home]은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앨범임에도 불구하고 그룹의 전형적 스타일을 담은 <Whaling Stories>와 악마적 분위기가 나는 <Dead Man's Dream> 등 몇몇 뛰어난 곡들을 담고 있다.

한편 이 시기에 역시 이들은 [Loiquorice John Death & The All Stars]라는 이름으로 록큰롤 스탠다드를 모아놓은 앨범을 녹음하기도 한다. 그러나 Paramounts의 팬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만들어진 이 앨범은 발표되지 않았고 (80년대에 CD로 발매됨), 단지 73년 Grand Hotel의 <For Liquorice John>이 라는 곡과 연관성을 가질 뿐이다.

Procol Harum은 71년 [Home]에서 실추된 이미지를 극복하려는 듯 레이블을 Chrysalis 옮기고 세련된 디자인의 앨범 [Broken Barricades]를 발표한다. 비록 라이브에서 자주 인용되는 <Simple broken_retail_cd-front.jpgSister>같은 고전을 담고 있긴 하지만 이 앨범 또한 잘못된 곡 편성, 단순해지고 약해진 Gary의 보컬, 진부하고 지루함을 주는 앨범 전채 분위기는 이 앨범을 음악적으로나 상업적으로나 그들의 최악의 앨범으로 남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러한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이자 결과는 Robin Trower의 음악적 갈등과 탈퇴일 것이다. Procol Harum은 Keith를 제외한 4인조로서 두장의 앨범[Home], [Broken Barricades]를 발표했는데, 여기에는 Robin의 기타가 전면에 나서고 있다. 그들은 베이스 사용의 필요성성을 느끼고 지나친 올갠의 사용을 자제하려 했고, 자연히 Robin의 그룹 내에서의 역할은 중요해지게 된다.

하지만 70년 9월 Jimi Hendrix의 죽음은 Robin Trower에게 심대한 영향을 주었고, 헨드릭스로부터 영향을 받4은 그의 기타 연주는 Procol Harum의 파노라마같은 음악과는 양립할 수 없었다. 그 후 그는 Hendrix로부터 영향받은 3인조 그룹을 결성해 지속적인 성공을 거둔다 하지만 Procol Harum에게 있어서는 이제 전성기의 막을 내릴 시점에 도달한 것이다.

그의 후임으로 Procol Harum은 Big Bertha 출신의 Dave Ball을 영입하고, Chris Copping(그는 가끔 라이브에서 베이스 기타 대신 베이스 키보드를 사용했다.)은 베이스를 Alan Cartwright에게 넘겨주고, 올갠만을 전념하게 된다.

 

장엄한 드라마 Procol Harum Live Concert

live_retail_cd-front.jpg 이제 그들은 다시 5명의 멤버가 되었고, 야심찬 프로젝트를 시도하기로 결정한다. 71년 11월 열렬한 팬이다. 록 음악 작곡가인 한 캐나다인의 초청을 받아 Procol Harum은 캐나다에서 Edmonton Synphony 오케스트라, Da Camera Singers와 함께 콘서트를 갖는다. 70년에 이루어진 Deep Purple의 [Concerto For Group & Orchestra]이후 록과 클래식의 조우였던 이 공연은 52명의 연주자로 구성된 오케스트라와 24명의 합창단 그리고 6명의 록뮤지션의 협연이었다.

Gary 자신에 의해 쓰여진 슬리브 노트는 그 이벤트를 감쌌던 흥분과 충격을 소개하고 있다. <Conquistador>, <A Salty Dog>, <Whaling Stories>와 <In Held Twas In I>등 Gary의 스코어링과 오케스트레이션 어레인지, 4채널의 음향효과는 오리지널 스튜디오 곡들의 감흥은 전혀 감소되지 않았다. 비록 뒷 면을 가득 메우고 있는 <In Held Twas In I>에서는 Robin Trower의 공백과 Gary의 다소 위축된 보컬이 원곡보다 덜한 감흥을 느끼게 하지만 라이브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Procol Harum은 자신들이 한 작업 중 가장 성공한 앨범 중 하나이다. 비평가들은 이 앨범을 극찬했고 미국에서도 대단한 히트를 기록한다.

 

아름다운 감성으로 가득 찬 후반기 명반 Grand Hotel

grand_retail_cd-front.jpg 72년 9월 기타리스트 Dave Ball이 다음 앨범 [Grand Hotel]의 기타파트를 녹음 한 채로 떠나고, Plastic Penny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는 Mick Grabham이 가입한다.(그의 가입후 기타 파트가 다시 녹음 된다.)

콘서트 지연과 연장으로 뒤로 미루어졌던 그들의 일곱 번째 앨범 [Grand Hotel]이 73년 4월에 발표되는데, 많은 Procol Harum 팬들은 이를 그들의 후반기 명반으로 손꼽는다. 연속된 스튜디오 앨범의 실패는 Gary로 하여금 Procol Harum의 사운드를 다시 과거 [Home]이전의 시기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이러한 그의 의지가 담긴 이 앨범은 확실히 아름다운 앨범이었다. 라이브 앨범에서 들을 수 있었던 오케스트라와 합창을 위한 스코어링과 어레인징 파트의 테크닉은 이 앨범에서도 잘 사용되고 있다.

특히 [Shine On Brightly]에 있는 <Magdalen]을 연상케하는 웅장한 왈츠곡풍의 타이틀 트랙 <Grand Hotel>이 그러하다. 앨범 속에 가사와 함께 삽입된 Spencer Zahn의 스케치가 담긴 24페이지의 소책자는 레코드 수집가들을 만족시킬만 했다. 아름다운 여성 코러스가 인상적인 <Fires>에서의 백그라운드 합창은 Swingle Singers에 의해서 이루어졌으며, 새로 가입한 믹 그래함의 달콤한 기타웍은 Robin Trower보다 더욱 감상적으로 느껴진다.

 

Exotic Birds And Fruit, Procol's Ninth와 Something Magic

exotic_retail_cd-front.jpg cover_584920722008.jpg Jakob Bogdani의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져있는 커버를 가진 그들의 여덟 번째 앨범이 74년 4월에 발매된다. 이전 앨범의 정교한 오케스트라 배경은 사라지고, 대신에 그들은 스튜디오로 돌아가 라이브를 연주했다. 그 결과 음악은 더욱 가벼워졌지만 다행히도 균형이 맞는 작품이었다. 전성기 시절을 연상케 하는 <Beyond The Pale>과 아름다운 곡 <As Strong As Samson>이 돋보이며, <Nothing But The Truth>, <Fresh Fruit>와 <Thin End Of The Wedge>같은 멋있는 트랙으로 가득차 있다.

[Exotic Birds And Fruit] 발표후 Procol Harum은 [Home] 이후의 앨범들을 프로듀스했던 Chris Thomson을 대신할 프로듀서와 엔지니어를 찾아 나선다. 이렇게 해서 기용된 Jerry Leiber와 Mike Stoller의 작업으로 이루어진 [Procol's Ninth]는 Procol Harum의 음악 스타일을 완전히 과거로 되돌아가게 만들었다. 이 앨범은 그룹의 R&B의 뿌리를 보여주는 짧은 곡들과 비틀즈의 <Eight Days A Week>도 담고 있으며, 가사도 Keith Reid의 이해 쓰여지지 않았다. 이 앨범은 그들이 지쳐 some_retail_cd-front.jpg 있음을 보여줄 뿐이었다.

76년 5월, Decca는 Procol Harum의 초창기 싱글들과 미발표곡 2개 (그 중 <Monsieur Armand>라는 곡은 [Exotic Birds And Fruit]의 <Monsieur R. Monde>의 기반이 된 곡이다.)fmf 담은 [Rock Roots: Procol Harum]을 편집앨범으로 발매한다. 이 앨범에서는 초창기 싱글로만 발표되었던 <Humburg>를 들을 수 있다.

[Procol's Ninth]발표 후 Alan Cart-wright가 그룹을 떠나고 그 자리를 메우기 위해 Chris Copping이 올갠 파트에서 베이스 파트로 이동하는 동시에 세션 전문 키보디스트 Pete Sollie가 올갠을 담당하게 된다.

90년대 들어서 Gary, Robin, Matthew와 Keith가 Procol Harum을 재결성하기 전에 발표된 마지막 앨범 [Something Magic]이 77년 3월 발표된다. 다시 정교한 오케스트레이션을 도입하려 한 이 앨범은 <In Held Twas In I>에서 탐구했던 것과 동일한 주제를 도입했다.

레코드의 한쪽 면을 가득 채운 <The Worm In The Tree>는 전체적으로 꽉찬 오케스트레이션을 배경으로 나레이션으로 구성되어있다. 하지만 시도 자체는 <In Held Twas In I>와 비슷했지만 그들의 개성이 좀처럼 느껴지지 않으며, 팬들과 음악평론가들의 반응도 시큰둥했다. 불행히도 이 앨범은 안 좋은 시기에 안 좋은 반응을 얻은 것이다. 이러한 결과는 밴드의 명성과 타격을 주었고 여기다 Chris Copping이 다시 탈퇴해 그룹의 사기는 더욱 저하된다.

 

해산 그리고 재결성

cover_4150152582009.jpg [Something Magic]의 홍보를 위한 투어가 끝나자마자 Procol Harum은 팬들과 작별을 고한다. 61년에 결성된 Paramounts에서 시작해 67년 Procol Harum결성. 77년 해산에 이르기까지 10장의 정규앨범을 발표한 그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음을 느낀 것이다. 리더격인 Gary는 솔로로 전향해서79년과 82년에 각각 Chrysalis에서 [No Fear Of Flying]을, Phonogram에서 [Lead Me To The Water](에릭 클랩튼, 조지 해리슨, 필 콜린스 참여)를 발표한다. 하지만 그룹은 해산했지만 그 명성만은 살아있었다. 록의 암흑기인 80년대 들어서 초창기 앨범들의 재발매와 CD 컴파일레이션이 계속 발매되어 Procol Harum이라는 이름은 팬들의 머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90년, 솔로작업을 하던 Gary는 자신이 Procol Harum의 레코드를 만들고 싶음을 발견하고 Keith Reid에게 전화하는 것을 시작으로 그룹의 재결성 작업이 진행된다. 91년 말 Gary, Robin, Matthew와 Keith는 현대적 감각이 두드러지는 (하지만 왠지 정이 별로 안가는) 통산 11번째 앨범 [The prodigal Stranger]를 녹음한다. 하지만 이 앨범의 의의는 음악적 성과보다는 발매 자체에 있다.

그들의 재결성은 단순한 호기도 아니었고, 엣 어릴 적의 친구들이 다시 모여보자는 의미에서만 일을 벌릴 것도 아니었다. Keith와 Gary는 깊은 공감대를 가졌고, Robin은 이 앨범에서 연주하기를 원했다.(하지만 Robin은 투어에는 참여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순수한 음악적 동기에서 만난 것이다. 해산 후 10년이 더 지난 후에 이제는 40대의 중년의 모습으로 다가온 Procol Harum, 그러나 그들의 음악에서는 아직도 젊음이 넘쳐나고 있다. 그것은 음악에 대한 정열에서 기인한다.

 

마치면서

미국과 영국에서 얻었던 명성에 비해 국내에서는 단지 <A Whiter Shade Of Pale>이라는 히트곡으로만 대접받아 온 Procol Harum, 그들이 아트록 매거진에 Camel과 Strawbs라는 슈퍼그룹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는 사살에 독자들을 고개를 갸우뚱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In Held Twas In I>와 같은 곡을 들어보게 된다면, 우리들이 Procol Harum의 음악에 관심을 덜 가졌던 것은 그들의 음악이 뒤떨어져서가 아니라 국내에 그만큼 덜 소개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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