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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248
마음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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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수 : 20153
2009.01.13 (13:44:59)
ARTIST:  Emerson Lake & Palmer 
COUNTRY:  U.K. 
GENRE:  Symphonic Prog 
ALBUM:  Emerson, Lake and Palmer (70)
Tarkus (71)
Trilogy (72)
Brain Salad Surgery (73)
Works Vol. 1 (77)
Works Vol. 2 (77)
Love Beach (78)
Emerson, Lake & Powell(85)
Black Moon (92)
In the Hot Seat (94)

-Live Album-
Pictures At An Exhibition(72)
Welcome Back My Friends...(74)
In Concert(79)
Live At The Royal Albert Hall(93)
Work Live(93)
King Biscuit Flower Hour(97) 
MEMBER:  - Keith Emerson / keyboards
- Greg Lake / vocals, bass, guitars
- Carl Palmer / drums, percussion 
원본출처:   

elp1.jpg1994년 3월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한 스튜디오에서 4장짜리 딜럭스 CD인 “The Return Of The Manticore"의 발매 기념과 아울러 ELP의 결성 25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Victory 레코드사에서 마련해준 파티에 Keith Emerson이 단상에 올라와 축사를 하기 시작했다. ”25년동안 한결같이 저희들의 음악을 사랑해 주신 팬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리를 마련해주신 Victory 레코드사에게도 심심한 감사를...“ 왠지 모를 우울함이 그의 얼굴빛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드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술을 뗐다. ”저는 앞으로 더 이상 건반을 누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느닷없는 그의 말에 모두들 상대방의 얼굴을 쳐다보며 Keith가 왜 이런 자리에서 저런 농담을 하는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수군거리자 그난 다시 짤막하게. ”진실입니다“ 라고 말한 뒤 돌연 연회장을 빠져 나갔다.
물론 이것은 필자의 가상이다. 하지만 그 가상이 현실로 일어날 수도 있다는 예감을 접할 수 있었다. 물론 김일성 사망처럼 갑작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지난 4월 미국에서 발행되는 음악전문 잡지인 “Keyboard"지에 Keith Emerson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ELP 결성이 올해로 25년이 되었고 해서 의례적인 요식 행위인줄 알고 별 관심없이 넘겨보다가 심각한 그의 사진을 보고 예삿 일이 아니다 싶어 차분히 읽기 시작했다. 아니나다를까 그 기사는 Keith의 앞으로 음악 emerson_lake_palmer_1.jpg생활 전체를 청산해야 할지도 모르는 그의 질병에 관한 이야기였다. 대강의 이야기는 그의 오른쪽 팔꿈치에서 팔목으로 들어오는 신경이 심한 압박으로 이상이 생겨 오른쪽 손가락 가운데 네 번째와 다섯 번째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으며, 또한 오른쪽 팔로는 어깨 높이만큼으로 물체를 들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의 주치의인 Robert Bassett박사는 이런 류의 병은 일반적으로 같은 계통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서는 흔하게 나타나는 병이 아니라는 소견을 말하면서, 아마도 그의 연주 습관이 지금의 사태를 초래하지 않았나 하는 그의 조심스러운 견해를 밝혀 놓았다.
그리고 수술 뒤 만족할만한 성과가 나오지 않으면 어쩌면 중대 결단까지도 생각해야 하는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나타내기도 했다. ELP의 팬으로서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쓰는 매니아로서 그의 빠른 완치와 쾌유를 바라며, 트리오로서의 가능성과 성공을 보여준 이들의 이야기를 적어볼까 한다.

풍부한 음악적 환경에서 자란 Keith Emerson
413810424_c770b035d3.jpg제 2차 세계대전이 거의 끝나갈 무렵인 1944년 11월 2일 영국의 랭카셔주의 한 마을인 Todmorden에서 Keith Noel Emerson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전기 계통의 엔지니어였지만 뛰어난 감각으로 여러 악기를 다룰줄 알았으며 어머니는 피아노 교사, 고모는 댄스교실을 운영하고 있었으며 할아버지는 직접 곡을 쓰는 등 음악적 재능이 탁월한 가족이었다. Keith가 처음 음악을 시작한 기억은 그의 부모가 집에서 마련한 ‘음악의 밤’이라는 연주 모임이었다고 한다.
일과가 끝난 뒤 이웃 친지들이 모여 가졌던 이 작은 음악회는 그의 어릴적 인성 형성에 큰 역할을 했다. 그가 7살이 되었을 때 그의 부모는 그에게 피아노를 선물했다. “나는 철들기 전부터 음악을 들으며 자라왔고. 또 음악 듣는 것을 며우 좋아합니다. 게다가 직접 내가 피아노를 연주한다는 것은 정말 즐거운 일이었지요...”이렇게 당시를 기억하는 그는 피아노를 통해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보이기 시작해 얼마되지 않아 그의 아버지와 간단한 합주를 할수 있을 정도까지 이르렀다. 그런 아들의 재능을 아버지는 놓치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아버지는 Keith에게 정식으로 피아노 레슨 교습을 권했다. 또한 Keith 역시 싫증내지 않고 아버지가 의도한 - 정식교육의 중요함 - 만큼 충실하게 따라갔다.
1955년 그의 나이 10살 때 Southcoast에서 매년 개최되는 음악제에 약관의 나이에 출전했다. 10살짜리emerson.jpg 꼬마가 많은 관중들 앞에서 우리가 흔히 생각할수 있는 체르니나 바이에른 같은 연습용 곡이 아닌 바하의 곡을 연주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물론 이러한 질문은 한낱 기우에 지난다고 볼수 있다. Keith Emerson에게 있어서는. 그는 이 대회에 참가해 바하의 곡으로 3위에 입상했으며 그 다음 해에는 2위에 입상하는 성적을 거두었다.
그가 관중들 앞에서 첫 연주를 했던 1955년은 록 뮤직에 있어서는 매우 커다란 의미를 갖는 해였다. 미국에서 Little Richard와 Chuck Berry등의 록큰록러등이 대중들에게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영국에서도 이러한 새로운 기운이 싹트기 시작한 시기였다. 그러나 Keith에게 있어서 그러한 조류는 관심 밖이었다. 그 이유에 대해 그는 “나는 당시 젊은이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는 음악을 거의 듣지 않았어요. 우리집에는 플레이어가 없었고 아버지도 그런 음악을 들을 나이가 아니었고 비교적 집이 시골에 있어서...”지금의 그가 있기까지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사람은 바로 그의 아버지였다.
그때 Keith는 아버지나 아버지의 친구들이 연주하는 음악을 듣거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는 것이 고작이었는데 그 대부분이 재즈였다. 그로 인해 그는 자연스럽게 재즈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본격적인 음악활동 그리고 The Nice의 결성
14nice.jpg살이 되던 해에 그의 양친의 권유로 본격적인 음악공부를 위해 그는 런건으로 건너가 Music Accademy에 다니게 된다. 그러나 이곳에서 공부하면서 그는 자신이 배우는 이론과 그가 나름대로 생각했단 바에 대해 커다란 괴리감을 느끼게 되었다. 어릴적부터 재즈에 익숙해 있던 그에게 클래식 음악이 가져다 주는 딱딱한 형식에서 오는 부자연스러움은 그로 하여금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라고 간주하고 학업을 중도에 포기하고 한 재즈 클럽의 피아니스트로 일하기에 이른다.
당시 재즈가 젊은 이들에게 인기가 떨어지고 있었지만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오로지 재즈 피아니스트가 되기로 마음 먹고 17세때에는 국회의원의 스폰서가 되어 결성된 25명 편성의 재즈 오케스트라에 가담하게 되었다. 여기서 그와 뜻이 맞았던 베이스 주자. 드러머와 함께 재즈 트리오를 결성하여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트리오의 활동은 오래가지 못하고 말지만 이를 통해 락 싱어와 만나 락 그룹의 감각을 경험할수 있었던 기회였다. 트리오 해산 이후 그는 여러 클럽을 전전하면서 연주 생활을 계속해 나갔다.
그러나 그런 생활로는 도저히 생계를 꾸려나갈 수 없게 되자 그는 낮에는 은행에서 일을 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너무나 힘든 이 일을 감당하지 못하고 그는 은행 일을 집어치우고 한동안 밑바닥 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러던중 그는 T Bones의 멤버로 참가해 그룹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T Bones는 성공을 거두고 있었던 그룹들 가운데 한 팀이었으며 멤버 교체를 통해 분위기를 새롭게 하기 위해 그를 영입했다. 1년정도 그들과 함께 활동했던 Keith는 멤버들간의 불화와 음악적 견해차이로 인해 중도 하차 하기에 이른다.
그 무렵 그는 후에 The nice에서 같이 활동하게 될 Lee Jackson을 알게 되었다. T Bones를 탈퇴한 그는 Mike Harrison이 이끌었던 그룹 Buffs의 오르간 주자로 참가했다. 이 그룹은 Keith가 참가한지 얼마 안돼서 곧장 독일로 건너가 <I Wanna Be Free>라는 곡을 히트시켰다. 하지만 이들 역시 그룹 내부의 불화로 인해 Keith는 다시 영국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이후 Keith가 라이브 공연시 자주 보여주는 키보드 위로 뛰어오르는등의 액션은 이 시절부터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처음 이런식으로 연주한 것은 Buffs와 같이 파리에서 공연했을 때였어요. 어느날 밤 술에 취해서 무대에 올라가 그 술기운으로 오르간 위로 올라가 연주를 시작했죠. 관객들은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고 밴드와 일체가 되어 연주를 했던 것이죠...”영국으로 돌아온 그는 곧장 스코틀랜드로 건너가 마침 그곳에 와 있던 Graham Bond를 만나게 되었고 나중에 Keith와 The Nice를 결성한 Brian Davison 그리고 당시 Immediate 레이블을 설립한지 얼마안되는 Andrew Aldum을 알게된 것도 이때였다. 그후 Andrew는 흑인 여성 가수인 Patt Arnold가 백밴드를 구하고 있는데 해 볼 의향이 없느냐고 제의해 왔다.
“나로서는 백 밴드라는 것은 아무래도 내키지 않았지만 쇼의 반은 자유롭게 연주하도록 해 주겠다고 약속했고 해서 그 제의를 받아들였죠. 하지만 밴드를 결성하는데 4일의 여유 밖에 없어서 좀 힘들었어요..” 한편 에피소드로 들려오는 이야기이지만, Keith가 런던을 헤메고 있을 때 Yardbirds의 매니져였던 Giorgio Gomelsky가 그룹 가입을 의뢰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만일 Keith가 Yardbirds에 가입했다면 70년대 브리티쉬 음악계의 판도가 크게 변하지 않았을까???
멤버를 갖춘 읻르은 그룹명을 The nice로 하고 곧장 Bristol로 향했다. 계약대로 쇼의 반은 이들의 단독 스테이지였으나 급조(急造)된 그룹이라 음악적 통일성을 갖기에는 역부족 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들 나름의 특색을 살리기 히작했가. 이어 그룹 결성 반년 뒤 이들은 런던에서 열린 제 7회 National Jazz And Blues Festival에 참가했다. 데뷔 무데나 다름없어TEjs 이 페스티벌에서 Keith는 채찍을 휘두르거나 오르간을 뛰어넘고 스피커에 칼을 꽂는등의 드라마틱한 모습을 보여줘 관객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어냈다. 퍼포먼서(Performancer)로서의 행위예술을 보여주었던 Keith의 특이한 행동과 음악은 P.Arnold가 비자 문제로 미국에 돌아간 뒤 이들은 본격적인 프로의 무대로 등장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해냈다.
1968년 The Nice는 데뷔앨범인 “The Thoughts Of Emerlist Davjack"를 공개했다. 이후 이들은 BBC TV를 비롯해 각종 페스티벌에 참가해 이들의 인기는 급상승 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인기를 결정지은 것은 68년 7월에 발표한 싱글 emerson-1.jpg<America>의 대히트였다. 이 곡은 뮤지컬 ”West side story"에서 사용한 곡을 편곡한 것으로 챠트 29위까지 오르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 곡의 히트 뒤에 이들은 스위스. 독일 등지에서 공연을 가졌으며 특히 Hyde Park에서 열린 콘서트에는 15만명이라는 관객동원을 이루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승승장구하던 The Nice는 기타리스트인 David O'list의 탈퇴문제로 고민을 겪기에 이른다.
강렬한 록 스타일을 이끄는데 있어서 커다란 역할을 해냈던 그가 그룹을 떠나겠다고 말하기 시작한 것이 The Nice의 2집 구상이 끝나가던 때였다. “사실 그의 입장은 그룹이 독립하고 나서 매우 미묘한 것이었죠. (중략) 밴드 자체의 방향도 상당히 바뀌었고 아무래도 그의 음악적 방향과는 빗나가기 시작했던게 아닐까요? 게다가 그의 기타는 초기의 열기도 없어진 것 같고...”그래서 그는 이전부터 자신이 생각해 오던 것. 즉 클래식 음악을 재즈나 록으로 편곡해 연주하는 것을 2집에 반영하기로 하고 바하. 시벨리우스의 곡을 오케스트라와 연주해 만든 두 번째 앨범 “Ars Longa Vita Brevis(인생은 짦고 예술은 길다)”를 69년 4월에 발표했다.
Keith는 2집의 타이틀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 세상에는 여러 가지 사상적 차이는 있어도 음악이나 예술만은 모든 사람들이 자유로워질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고 모든 파워를 한데 모을 수 있다는... 그런 뜻고 있고 해서 앨범 타이틀을 이런 식으로 했죠.” 아마도 냉전(冷戰)시대의 종결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앨범 타이틀을 정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이어 그해 7월 이들은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에서 라이브 무대를 가졌고 세 번째 앨범인 “Nice"를 공개했다.
이 앨범 이후 Keith는 클래식 음악과 클래식. 그리고 록을 한데 섞어 연주할수 있는 퓨전적 형태의 음악에 많은 관심을 갖고 The Nice로서는 그러한 음악을 하는데 있어서 부족하다고 판단하고 새로운 그룹을 결성하기로 하고 은밀히 멤버를 찾기 시작했다.
이러는 동안에도 70년 네 번째 앨범으로 Lee Jackson이 살고 있던 곳의 다리(교각)에 대한 조곡을 만들어 표현한 “The Five Bridges Suite"를 발표하였으며, 이와 때를 같이해 The Nice는 King Crimson과 함께 미국 투어를 떠났다
이들이 뉴욕에서 머물고 있었을 때 Keith는 Rober Fripp과 이야기를 나누던중 새로운 그룹에 대한 확신을 얻고 그 첫 멤버로 Greg Lake를 염두해 두고 있었다. 영국으로 돌아온 뒤에도 Greg과의 계속적인 만남을 통해 Keith는 새로움의 가능성에 대한 지속적인 의사 타진을 하고 있었다. Greg은 Keith에게 당시 새로운 악기로 모든 이들의 주목을 받고 있었던 Robert Moog박사가 고안한 Moog의 사용을 권유했다.
Hammond Organ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던 그는 Greg을 따라 올림피아에서 개최되고 있었던 “International Audio And Music Fair"에서 처음으로 Moog synthesizer를 구입했다. 이어 71년 The Nice의 마지막 작품으로 기록되는 ”Elegy"를 내놓는다. 그룹 해산 이후 Lee Jackson은 Jackson Heights를 Brian은 Every Whichway를 결성했다.

ELP의 또다른 신화 Greg Lake
GregLake82(2).jpgGreg Lake는 1948년 11월 10일 Bournemouth에서 태어났다. Greg의 어머니는 피아노를 쳤으나 아버지는 이렇다할 음악적 재능은 없었다. 아버지의 진보적이면서도 자유로운 사고 방식의 교육으로 인해 그는 항상 자신에 대해서는 엄격한 자유주의자가 되려고 노력했다. 어릴적부터 예술에 관심이 많았던 Greg은 그림이나 시, 음악과 같은 여러 가지 예술에 흥미를 갖고 나름대로의 안목을 키워 나갔다. 후에 유명해진 “Lucky Man”이라는 곡은 그가 12살 때 작곡했던 곡이었다고 할 정도로 그의 음악적 감각은 탁월했다. Greg이 처음 기타를 잡은 것은 12살 때 였다. 당시 영국의 팝송은 Cliff Richard가 거의 장악하고 있었으며, 그의 백 밴드인 Shadows는 <Apache>라는 연주곡의 시트로 단독 그룹 활동을 하려던 참이었다. 이 당시 그의 우상은 다름아닌 Shadows의 기타리스트인 Hanks Marvin이었다. 그의 기타 플레이에 매료되었던 Greg은 어머니를 졸라 중고 악기점에 걸려 있건 기타를 수입하여 정식으로 기타 레슨을 받기에 이른다. 얼마동안 배웠던 이 기타 교습생 가운데 후에 King Crimson에서 같이 활동했던 Robert Fripp도 끼어 있었다.

본격적인 프로활동
65년 중학교를 중퇴한 그는 자신의 고향 근처에서 활동하던 세미프로 밴드에 들어갔다가 1년동안 지낸 뒤 탈퇴해 자신의 그룹을 결성했다. 그의 뮤지션으로의 길에대해 부모님은, “내가 프로 뮤지션이 되겠다고 했을 때 두분의 반응은 달랐어요. 아버지는 gr.jpg어머니와 달리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이해를 못하신 것 같아요... 하지만 두분은 나의 인생이니까 네가 좋을대로 하라고 말씀하셨어요.” 중학교를 중퇴하고 딴따라로 나선다. 도무지 우리네 부모님 세대의 상식으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지만, 단지 자신의 인생에 책임을 지라는 틀에 박힌 말 한마디가 Greg의 인생항로를 이렇게 바꿔놓은 것이다. 그러나 그 역시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곤란한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1967년 그는 본격적인 프로뮤지션이 되기 위해 Uriah Heep의 전신이었던 Gods에 들어갔다. 이 그룹은 후에 The Rolling stones에 가담하는 Mick Taylor와 Uriah Heep의 키보디스트였던 Ken Hensley같은 뮤지션들이 있었다. Gods 결성 이후 얼마 되지 않아 가입한 그는 보컬리스트로 기타를 치다가 나중에 베이스로 바꾸고 리더로 활약했다. 그러나 이 팀에서Greg은 이렇다할 음악적 모티브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던중 68년 12월 예전에 자신과 같이 기타 교습을 받았던 Robert Fripp으로부터 새로운 그룹결성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Greg은 Fripp의 권유로 인해 King Crimson의 오리지널 멤버로 69년 1월 런던에 있는 카페 지하실에서 3개월의 리허설 작업을 시작했다. 이어 3월말 BBC TV의 “Top Of The Pops"라는 프로에 출연하면서 팬들의 인식을 확산시켜 나갔다. 이런 그들의 인기를 절대적으로 높여준 계기가 된 것은 69년 7월 5일 Hyde Park에서 열린 The Rolling Stones의 Brian Jones의 추도 콘서트에서의 대활약이었다. 25만명 관객 앞에서의 ‘21st Century Schizoid Man'을 비롯한 여러 곡을 연주해 참가 관객들로부터 열광적인 지지를 얻어냈다. 이후 이들은 데뷔작인 ”In The Court Of The Crimson king"을 발표했다.
이 작품은 당시 경이적인 기록을 올리고 있었던 Beatles의 “Abbey Road"앨범을 제치고 챠트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해냈다. 10월 중순부터 두달에 걸친 미국 투어를 끝내고 귀국하던중 Mike Giles와 Ian Mcdonald가 그룹을 탈퇴해 위기를 맞게된가. 그러던중 Greg역시 Keith와 새로운 팀에 관한 은밀한 이야기를 진행 시키고 있었다. ”내가 King Crimson을 떠난데에는 많은 이유가 있죠. Ian과 Pete는 Robert의 방식을 좋아하지 않았죠. 그는 혼자 너무 앞서가고 있었던 겁니다...(중략) King Crimson의 동료들은 대단했지만 내가 원하는 방향과는 맞지 않았고 나는 Keith와 록 그룹을 결성해 그들과 함께 무언가를 하고 싶었어요.“ 이렇게 모인 Keith와 Greg은 새로운 그룹의 또 한 멤버를 찾기로 하고 그에 적당한 인물을 찾아냈는데 그가 다름아닌 천재적 재능을 평가받고 있던 Carl Palmer라는 뮤지션 이었다.

천부적 재능의 소유자 Carl Palmer
carl_palmer.jpgELP라는 트리오에서 가장 젊은 뮤지션이었던 Carl은 1950년 3월 20일 Birmingham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Keith Emerson과 마찬가지로 음악을 좋아하는 집안으로 Emerson家 보다는 정규교육을 받은 가족들 이었다. 그의 아버니는 로컬밴드의 싱어였고, 할아버지는 오케스트라의 타악기 주자였으며, 그의 큰할아버지는 Royal Accademy 음악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던 선생님 이었다. 이러한 음악적으로 혜택 받은 환경에서 자라는 Carl이 어릴적부터 가까이했던 음악은 주로 재즈였다. Carl이 처음 드럼을 구입했던 것은 11살 때 우연히 가게 앞을 지나다가 진열장에서 번쩍거리는 드럼 세트를 보게 되었고 부모를 졸라 그것을 구입하기에 이르지만 그 당시 Carl은 그것이 드럼인줄 전혀 몰랐다고 한다. 그러나 그 물건에 서너번 손만 갔을뿐 실제 이 드럼 세트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은 바로 그의 아버지였다.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된후 Carl은 본격적인 드럼 연습을 하기 시작했고, 아버지로부터 당시 최고의 제품으로 손꼽혔던 Olympia 드럼세트를 선물 받고 본격적인 드럼 교습을 받는다. 당시 Carl이 사사받은 교사는 Midland Live Orchestra의 멤버였다. 이렇게 많은 시간을 드럼 연습에 몰두했던 Carl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학교에서는 무엇을 해도 평균 이하였어요. 지나치게 드럼 연습에 열중했기 때문이죠. 학교 공부따윈 할 시간이 없었어요... 그래서 학교 공부는 형평 없었지만 드럼만은 누구보다 잘 연주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죠.” 이렇게 해서 13살이 되었을 때 그는 같은 학교에 다니던 Steve Winwood와 밴드를 조직해 클럽에 출연했다. 거의 식음 전폐하고 드럼연주에만 전념하다시피한 Carl은 14살 무렵에는 드럼 교사를 능가할 정도의 실력을 갖추기에 이르렀다.
그 이후에도 그는 지속적인 드럼 공부와 병행해 Central City band라는 클럽 밴드에서 40세 정도의 뮤지션들과 연주를 하기도 하고, 여러 밴드에 참가해 많은 음악적 경험도 쌓아나갔다. Carl은 15세때 프로뮤지션이 되기로 결심한 뒤, 학교를 포기하고 첫 프로밴드인 Meka Dance Band에 가입했다. 이 밴드는 왈츠나 탱고등을 전문적으로 연주하는 그룹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또한 Birmingham을 중심으로 활약하고 있었던 King Biz에 가입해 ‘You must be but'이라는 곡을 히트시켜 TV프로그램에도 출연하는등 118616.jpg록그룹으로서의 첫 성곡을 맛보았다.  
67년 King Biz가 해산하기에 이르자 Carl은 Thunderbirds에 가입했는데, 이팀에서는 Dave Greenslade나 Albert Lee같은 뛰어난 뮤지션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1년동안 그 팀에서 활동한 뒤 Carl 은 68년 3월 영국 록계의 기인인 Arther Brown이 이끌었던 The Cra world of Arthur Brown에 가입했다. 당시 이들은 런던에서 많은 프로그레시브 그룹들이 출연해 유명해진 UFO클럽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69년 1월 6주간의 투어 공연을 하기 위해 이국으로 거너가 이TEjs Wincent Graham을 받아들여 Atomis Rooster라는 새로운 팀을 조직했다. 신진 록 그룹으로서 절대적인 지지를 얻어냈던 이들은 70년 B&C레이블과 계약을 맺고 두 달에 걸친 작업 끝네 그해 말 동명 타이틀의 데뷔작을 공개했다.
이어 그들은 Ginger Baker가 이끌었던 Airforce와 함께 조인트 콘서트를 갖는등 정력적인 활동을 해나갔다. 그러나 Nick이 음악적 견해차로 인해 그룹을 탈퇴하게 되자 Carl은 새 멤버를 받아들여 Atomic Rooster를 꾸려 가려고 했다. 이러한 와중에 Keith와 Greg이 새로운 그룹 결성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으나 그는 그룹을 떠날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왜냐하면 Atomics Rooster를 자기 자신의 밴드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러한 제안을 고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새로 가입한 John이 Vincent와 함께 펑키한 음악을 추구하는데 대한 대립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점차 새로운 그룹에 대한 관심을 갖기에 이른다. 그래서 70년 5월 정식으로 그룹을 탈퇴하기로 하고 Atomic Rooster의 미국 공연을 취소한채, 5월 3일에 열린 Atomic Rooster - er - Last Performance With Carl Palmer라는 콘서트를 끝으로 그는 Atomic Rooster를 떠났다.

새로운 시대의 개막
elp-300x293.jpg이렇게 각기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었던 세명은 자신들이 트리오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잠정적으로 Triton이라는 그룹명을 사용하고 있었다. 사실 ELP가 트리오가 아닌 네명의 멤버로 이루어질뻔 했던 가능성이 있었다. 새로운 그룹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을 때 Keith Emerson은 자신과 친분 관계가 두터운 Jimi Hendrix를 끌어들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Jimi는 잼 세션의 스타일을 고집하는 바람에 그 노력은 무산되고 말았다. 만일 그가 참여했더라면 ELP가 아닌 HELP로서 좀더 색다르게 70년대 브리티쉬 음악이 전개되지 않았을까??
1970년 6월 세명의 전도유망한 젊은이들로 구성된 이들은 각자의 영역을 존중한다는 뜻에서 자신들의 이름을 딴 Emerson, Lake and Palmer라는 그룹명으로 정식 데뷔한다. 결성 직후 2개월 동안 런던의 문화회관에서 리허설을 가졌는데 당시의 레퍼토리 가운데에는 ‘21st Century Schizoid Man'을 비롯해 초기 오리지널 편곡인 'Pictures At An Ezhibition'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어 70년 8월 29일 The Isle Of Wight Festival에서 데뷔 무대를 갖는다. 아이러니컬하게도 ELP의 데뷔 무대였던 이 페스티벌은 Jimi Hendrix의 고별 무대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들은 9월에 영국 공연을 가지면서 점차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9월 16일 Melody Maker 誌가 발표한 투표에서 Keith가 건반 주자 부분에서 1위 그리고 ELP가 촉망 받는 그룹가운데 1위에 뽑혔다. 콘서트 활동과 병행해 이들은 Island 스튜디오에서 데뷔 앨범 녹은 작업을 시작해 70년 11월 20일 Island레이블을 통해 역사적인 데뷔작인 “Emerson, Lake & Palmer"를 그룹 결성 5개월 만에 발표했다.

클래식의 내부적 해체와 그 휴전(Fusion)화의 성공 - “Emerson, Lake & Palmer"
elp-first.jpg1970년, 브리티쉬 아트록만을 한정해 놓고 볼 때 그 절정을 향해 치달을 때였다. 이름이 알려진 그룹이건 아니건 간에 많은수의 그룹들이 활거했다. 운 좋게 레코드를 발매했던 팀들이 있는가 하면 몇 개의 테잎 작품만 남기가 사라진 후 20년이 지난 지금 마스터를 찾아내 복각화된 그룹들도 있다. 도대체 얼마만큼 많은 그룹들이 있었는지 파악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 ELP의 데뷔작은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킬만큼 파격적이면서도 혁신적은 노력이 돋보인 작품이었다. Keith Emerson의 예리한 건반 터치, 다이나믹 하면서 노련한 감각이 돋보이는 Carl의 파워풀한 드러밍, 초현실적인 가사와 에너제틱한 보컬의 Greg Lake, 이렇게 세명이 만들어낸 데뷔작은 차후에 등장하게 되는 유럽의 아트록 그룹들로 하여금 그 定型의 原典이 되었던 앨범이다. 옥 구슬 흐르는듯한 Keith의 Steinwayrjs반 터치는 클래식 작품을 매우 친숙한 멜로디로 만들어 내는 세련된 감각이 베어나고 있으며, Greg과 Carl의 곡 해석력 역시 탁월하다.
미국에서 이들의 데뷔작이 71년 1월 13일 Collection 레이블을 통해 공개되었는데 순식간에 밀리언 셀러를 기록하기도 했다.  데뷔작 발매 이후 이들은 70년 11월 Livepool의 공연을 시작으로 유럽 순회 공연을 실시했다. 이 공연 도중 Melody Maker誌와으 ldlsxjqb에서 Keith는 자신의 솔로 앨범에 관한 이야기를 해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그 제작에는 Carl이 ELP의 멤버로 추천 되기 전에 Keith가 물망에 떠올렸던 Colosseum출신의 Jon Hiseman이 거론되었다. 71년으로 접어 들면서 이들은 새 앨범의 리허설에 들어갔다. 그리고 이 리허설이 끝난 뒤 3월 26일 Newcastle City Hall에서 세 번째 앨범으로 발표되는 “Pictures At An Exhibition"의 실황 레코딩을 실시했다. 다음날 이들은 최초의 미국 공연을 위해 영국을 떠났다. 뉴욕의 카네기 홀을 비롯해 각지에서 열린 이들의 라이브 무대는 팬들에게 100% 만족을 전해준 공연이었다.

우상과 형상의 파괴 그리고 그것의 재조합 - “Tarkus"
eme.jpg1971년 5월 ELP의 두 번째 앨범으로 발매된 “Tarkus", Greg의 친구인 William Neal이 그린 가상의 동물 Tarkus를 커버로 하고 발표된 이 작품은 데뷔작에서 전면에 등장하기 않고 있던 무그 신디사이져(Moog Synthesizer)가 다중 녹음에 의해 오케스트레이션과 같은 사운드를 표출해내고 있다. 이 무그 신디사이져 주법에 대해 Keith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무그로 코드를 연주할 때는 처음부터 계획을 차근차근 세워두지 않으면 안됩니다. 마이너의 3화음을 내도록 튜닝을 미리 세트해 두지요. 무그는 마이너의 3화음 밖에 내지 못하기 때문에 메이져로 바꾸려고 하면 바이브레이션의 변화를 초래하게 되지요. 피아노의 경우는 간단하게 음계의 전환을 할 수 있지만 무그는 이점이 어려워요.“
데뷔작에서는 보조 프로듀서에 머물렀던 Greg이 이번 앨범에서는 혼자서 프로듀서 역할을 해냈다. 특히 Keith의 무그를 조금씩 그룹의 특성으로 받아들이는등 그룹의 방향을 명확하게 제시한 사람도 Greg이었다. 이 앨범을 접할 때 마다 가지는 의문중에 하나가 어떻게 해서 Tarkus라는 단어가 나왔느냐에 관한 것이다. 이것에 대해 Keith가 이야기 해놓은 것이 있다. “앨범을 레코딩한 후 우리는 어떤 타이틀을 붙이면 좋을지 고민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Greg의 친구 가운데 무척 감수성이 풍부하고 시각적인 인상파 일러스트를 그리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가 이 앨범을 들을 뒤에 그린 그림들이 [Tarkus]의 자켓이죠. 그리고 이 일러스트 동물에 무언가 읾을 붙여 주기 위해 그리스 신화를 뒤져 보았지만 딱 맞아 떨어지는게 없더군요. 어느날 밤, 공연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돌연 ‘Tarkus'라는 말이 머릿 속에 떠오르더군요. 집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사전을 뒤져 보았지만 ’Tarkus'라는 생물은 존재하지 않았어요. 어쟀든 그 이름은 일러스트에 꼭 맞는 것 같았어요. 결국 ‘Tarkus'라는 말 자체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죠.” Greg은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Tarkus는 총합적 역진화론 요컨데 파괴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지요.”
A면 에서는 “Tarkus 조곡”으로 되어 있고, Baus은 소품 스타일로 자여진 이 앨범은 The Nice 이래로 Keith의 건반 주자로서의 독자적인 세계를 재확인 시켜 주고 있으며, Greg의 보컬 파트또한 인상적이며 곡 전체가 보다 드라마틱한 구성을 띠고 있다. 이 앨범은 71년 6월 14일 미국에서 발매 되어 데뷔 앨범을 능가하는 판매를 기록해 골드 레코드를 수상했다. 또 Melody Maker誌는 “Tarkus"를 올해의 앨범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Tarkus" 발매 이후 이들은 유럽 공연을 떠나 6월에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발레 컴퍼니와 프랑크푸르트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의 조인트로 ”Mixed Media Event"를 실시하게 되었다. 이 이벤트는 이들이 초기부터 가장 아끼는 “전람회의 그림”에서 제재를 취해 이것을 ELP가 오케스트라와 연주하고 그 연주에 맞춰 발레를 하는 형태로 구성된 것이었다. 이것은 당시 유행하고 있었던 “Mixed Media Art" 활동의 하나로 계획된 것으로 공연 모습은 TV와 영화를 위해 필름에 수록되었다. 유럽 공연을 끝낸 이들은 계속해서 두 번째 미국 공연을 6주간에 걸쳐 나갔다. 이러한 정력적인 활동 덕택에 71년도 Melody Maker誌의 인기투표에서 Led Zeppelin을 제치고 그룹 부문 1위에 올랐다.
100회 남짓한 콘서트를 끝내고 록계의 톱으로 뛰어 오른 ELP의 멤버로서 또 프로듀서로서 Greg은 매우 지쳐 있었다. 그러나 다른 멤버와 달리 그는 휴식 취하기를 집요하게 거부하고 있었다. 또한 Greg은 이 무렵부터 프로듀서로의 활동을 개시해 Spontaneous Combustion이라는 그룹의 앨범을 제작하기도 했다.

클래식과 록의 절묘한 결합 - “Pictures At An Exhibition"
re_xhibition_front.jpgELP가 인기 정상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무렵 Greg에게는 한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그것은 지난 3월 Newcastle City Hall에서 녹음했던 “전람회의 그림”이 정식으로 앨범 발매를 하지 않았는데도 해적판이 나타나 대량으로 판매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면 Greg의 말을 잠깐 들어 보자. “나는 ‘전람회의 그림’을 세 번째 앨범으로 발표해야 할지, 그렇지 않으면 새로운 별개의 싱글로 발표해야 할지에 대해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어요. 그때 문제의 해적판이 시중에 나돌았지요” 결국 10월이 되서야 그때까지 시장에서 돌고 있던 실황 해적 음반을 회수하고 11월에 정식으로 “전람회의 그림”을 공개했다. 무소르그스키의 원작이 클래식 작품 가운데 폭넓은 대중적 지지를 받고 있는 점에 있어서도 이들의 시도는 대성곡이었다. 이로인해 ELP는 보다 확고하게 팬들에게 “클래식과 록의 융합을 지향하는 그룹”이라는 인식을 심어 주었다.
원곡에 충실하게 연주하고 있으면서도 이들만이 표현해 낼 수 있는 경이적인 구성력과 아이디어가 곳곳에 번쩍이고 있다. 지금까지 많은 수의 내노라하는 당대의 유명한 오케스트라들이 이 곡을 연주 했지만 이들만큼 독창성 있게 그리고 다이나믹한 짜임새를 가지고 접근 했던 팀은 없었을 것이다. 라벨의 오케스트레이션 편곡이 무색해 질정도로 세 사람의 뛰어난 감각이 이들로 하여금 또 하나의 명반을 만들게 했던 것이다.
72년 1월부터 두달동안 Advision 스튜디오에서 새 앨범의 레코딩을 끝낸 이들은 2개월에 걸친 미국 공연을 떠났다. 3월 10일 뉴욕의 Accademy Of Music에서의 공연을 필두로 20여일에 걸치는 전미 순회공연을 가졌다. 그리고 4월 1일 남미의 Puerto Rico로 날아가 San Juan 해변가에 위치한 Vega Baja에서 열린 “제 1회 Puerto Rico Festival"에 참가했다. 이 축제에는 ELP 이외에도 J.Geils Band, Mahavishnu Orchestra, B.B. King, Osibisa, AllMan Brothers Band등이 출현했다. 이들은 이 축제에서 ‘Take A Pebble', 'Lucky Man'을 연주했는데 열에 약한 무그가 고장이 나서 애를 먹기도 했다. 이 공연을 전후해서 이들은 지금까지 매니저를 바꾸었다. 그것에 대해 Keith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예전의 매니저와 헤어졌습니다. 그 이유는 금전적인 것과 무단으로 우리의 필름을 상영했기 때문이죠. 왜냐하면 우리는 필름 따위 보다는 무대를 보는 편이 훨씬 좋은 밴드이기 때문입니다.“ 미국 공연을 끝마치고 돌아온 이들은 네 번째 앨범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안정된 연주와 획기적인 진보와의 조화 - “Trilogy"
re_Trilogy-Front.jpg1972년 5월에 공개된 이들의 4집 “Trilogy"는 이제까지 시행착오를 거듭해온 이들이 비로소 ELP로서의 방향을 명확하게 내세운 앨범이었다. 군더더기 같은 것이 정리 되었으며 완벽한 팀워크가 이루어진 역작이었다. 또한 에피소드로 이들의 새 앨범의 커버를 Salvador Dali에게 부탁했는데 그가 너무 많은 액수를(50만 달러) 요구해 결국 포기하고 이들 세명의 얼굴을 일러스트한 Hipgnosis의 커버를 채택했다고 한다. 특히 이 작품에 대해 Carl은 대단한 자부심을 가졌던 것 같다. 그는 ”Emerson Lake & Palmer는 데뷔 시절과 비교해 보면 상당히 좋아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특히 "Trilogy"는 매우 좋은 작품입니다. 훌륭한 것은 노래가 좋은 탓도 있겠지만 연주가 굉장히 좋았기 때문이죠. 우리들은 모두 하나가 되어 연주했어요.“라고 말한 반면에 Greg은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Trilogy" 이외의 우리들 작품은 모두 유니크 하다고 봅니다. 첫 번째 앨범은 그룹의 스타일이나 방향을 제시하고 있고, "Tarkus"는 컨셉트 앨범이며, “Pictures At An Exhibition"은 클래식 작품을 테마로 한것입니다. 그러나 "Trilogy"는 작품의 아이디어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이렇게 같은 작품에 대해서도 각각의 해석이 달랐다.
1972년 연례행사인 Melody Maker誌의 투표에서 이들은 전년에 이어 그룹 부문 1위로 선정 되었다. 그러나 Now Musical Express誌의 투표에서는 신진 그룹인 Slade에 이어 2위에 선출되었다. 이어 이들은 9월 30일 런던에서 개최된 Melody Maker誌 주최의 콘서트에 Genesis, Focus, Wishbone Ash등과 같이 공연했다. 이 무대에서 그들은 “Tarkus"를 모델로 한 거대한 인형 두 개를 무대에 나란히 세워놓고 화려한 쇼를 펼쳤다. ”Tarkus"인형은 대포같은 양팔에서 불과 연기를 자욱하게 내뿜고, 양 다리 사이에서는 색종이를 눈보라처럼 쏟아 내었다. 연주의 클라이맥스 부분에서는 무그 콘트롤을 쥐고 있는 Keith가 괴물 “Tarkus"와 사투를 벌이는 광경을 연출했다. 이 공연은 관중들로 하여금 대단한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바로 그때부터 이들은 무대에 다양한 세트를 설치하고 아이디어를 짜내 보다 스케일이 큰 무대를 연출하게 되었다.

Manticore 레이블의 설립
한편 72년 1월에 King Crimson을 탈퇴한 Pete Sinfield는 자신의 고향에서 첫 솔로 앨범에 대한 구상을 마치고, 10월에 들어 Pete는 Greg과 Mel Colins, Keith Tippett등의 협력을 얻어 데뷔 앨범의 레코딩에 들어갔다. 그러는 동안에 ELP는 11월 10일 Greg의 고향인 Bournemouth에서의 공연을 시작으로 11월 27일 Brinhton의 마지막 공연까지 17일 동안 16개 도시를 순회하는 영국내 공연을 실시했다.
이 공연에서 Carl은 처음으로 Bob Moog가 고안한 Percussion Moog를 선보였다. 이처럼 Carl이 처음으로 무그를 사용하고 있을 무렵 Greg은 자신들의 레이블인 Manticore를 출범시키려고 Pete Sinfield와 그들의 매니져인 Stewart Young과 (그는 이들의 매니져가 되기 전에는 아버지와 함께 일하던 공인 회계사로서, 이들의 라이브 공연을 보고 나서 선뜻 매니저 제의를 수락했다고 한다.) 계획을 짜고 있었는데, 12월이 되자 그 계획으 sqhsrur적으로 이루어 졌다. 그리하여 73년 1월 ELP는 정식으로 Manticore 레이블을 설립했다. 이 레이블은 Greg의 “우리 음악의 정신적인 부분을 보다 강조하여 표혀해 가고 싶다.”는 기본 이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스탭에는 Greg의 구상에 지대한 영향을 준 Pete Sinfield를 맞이했다.
Manticore 레이블 설립을 발표한 뒤 Greg은 이태리 그룹인 PFM의 테뷔 앨범 “Photos Of Ghosts"의 보컬 더빙에 참가했다. PFM의 이 앨범은 Manticore레이블의 제 1탄으로 발매되었다. 이 레코드의 프로듀스는 Pete Sinfield가 담당했는데, 그는 ELP의 이태리 공연에 동행했을 때 ”Photos Of Ghosts"의 오리지널 버전인 “Per Un Amico"를 듣고 PFM에 흥미를 가졌다고 한다.
2월로 접어 들면서 ELP는 새 앨범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은 스튜디오에서 기본 트랙을 녹음하다가 돌연 유럽 공연의 여행길에 오르게 된다. 3월 31일 독일의 뒤셀도르프를 시작으로 5월 5일 로마 공연에서 막을 내리는 유럽공연을 실시했다. 이 공연은 이들이 편성한 사상 최대의 세계 일주 공연의 일부로 실시된 것이었다. 유럽 공연은 32일동안 9개국에서 27회의 공연을 하는 꽉 짜여진 스케줄에 의해 진행되어Tekj. 그러나 실제로 유럽 공연의 일부만 실시되었을뿐 세계일주 공연은 곧 중단되고 말았다.
그러나, 유럽 공연이 끝날 무렵 멤버들은 일종의 짜증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특히 Keith는 그러한 매너리즘을 탈피하려고 오토바이를 몰고 다니기도 했다. 그리고 런던의 한 아파트에서 살던 그는 한밤중이나 새벽에 갑자기 피아노를 쳐서 주민들의 항의를 받고 결국 그는 교외인 Sussex로 이사하기도 했다. 이렇게 이들은 알게모르게 반복되는 생활로 인해 점차 무력해지고 있었다. Keith는 그 상황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ELP의 창작활동은 잠시 정지 상태였습니다. 무슨 이유였는지는 알 수 없어요. 모든 록 그룹들이 이러한 침체기를 경헙합니다. 확실히 무언가 새로운 것을 시도해야 할 때였지요.” 73년 10월 이들은 5집을 발표하게에 앞서서 싱글인 “Brain Salad Surgery"를 발매하기로 발표했다. 11월이 되자 이들은 미국 각지를 2개월에 걸쳐 순회하는 미국 공연을 시작했다.

아우라(Aura)와 미메시스(Mimesis) : 그 混成의 美學 - "Brain Salad Surgery"
brain_salad_surgery.jpg자신들이 설립한 레이블인 Manticore를 통해 발표된 첫 앨범인 "Brain Salad Surgery"는 무그 신디사이저를 개량한 커스텀 무그 신디사이져 (Custom Moog Synthesizer), 퍼커션 신디사이져. 무그 폴리포닉등 새로운 기계를 대폭적으로 도입함과 동시에 Pete Sinfield에게 작사면에서 협력을 구하는등 9개월의 세월을 들여서 완성시킨 의욕작이다. Greg은 이 작품에 대해 “이번에 발표된 새 앨범은 테크니컬한 면보다 하모니나 멜로디의 구성에 중점을 두고 제작했습니다. 소울풀한 감정을 넣어 이전의 앨범보다 한결 볼륨이 있는 사운드를 창조해 냈죠.”라고 언급했다.
H.R. Giger에 의해 그려진 앨범 커버를 보는 순간 이들의 2집인 “Tarkus"를 등장시켰다면, 이 앨범은 기계화된 고도의 문명, 그 종말을 암시하는 듯한 섬뜩함을 안겨다 준다.
물질 문명에 의해 매몰 되어 가는 인간성에 대한 준엄한 경고라고 할수 있을까? Albert Cinastera의 피아토 콘체르토 1번의 4악장을 편곡해 보여준 ‘Toccata"의 미메시스(모방)와 이들만의 독창적인 아우라(개성)가 절묘하게 표현된 ’Karn Evil 9'이 이 작품의 음적(音的)공간에 있어서 황금분할의 비로 자리 잡고 있다.
1974년 3월부터 4월에 걸쳐 다시 유럽으로 공연을 떠난 이들은 4월 6일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로스앤젤레스 교외에서 열린 “California Jam"에 출연했다. 이 공연에는 Deep Purple을 비롯해 Eagles, Earth Wind & Fire등이 참가했으며, 이들은 30만명의 관객들 앞에서 ‘Jerusalem'을 비롯해 이들의 히트곡을 연주했다.
이들은 미국에서 귀국한 뒤 4월 18일부터 시작하는 Wembley Empire Pool에서의 4일간 연속 콘서트를 시초로 1년 반만에 영국 공연을 개최했다. 이 공연을 위해 기계도 미국에서 갖고 들어왔는데 그때 세관에서는 모든 기계를 7일간에 걸쳐서 상세히 체크하여 3천 파운드나 되는 관세를 징수 하였다고 한다. 그 때문에 공연 전날에야 기계가 들어와 스탭들은 시스템 세팅과 리허설을 하기 위해 밤을 세워야 했다. 이 영국 공연은 4월 29일부터 3일간 연속으로 열렸던 Livepool에서의 콘서트를 마지막으로 막을 내렸다.

격정적인 라이브 무대 그 생생한 현장감
"Welcome Back My Friends To The Show That Never Ends - Ladies & Gentlemen"
never_end_front.jpg74년 7월 ELP는 그룹 결성 4주년을 기념해서 세장이 한 세트로된 딜럭스 라이브 앨범인 “Welcome Back My Friends To The Show That Never Ends”를 발표했다. 이 앨범은 73년과 74년 세계 일주 공연을 집대성한 것으로, 앨범 타이틀은 4월 18일 Wembley의 콘서트에서 사회를 담당한 DJ Alan Freeman의 소개문구를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이 초대작 라이브 앨범에 대해 Carl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앨범은 무대에서의 연주 방법을 나타낸 것입니다. 앨범에 곡이 수록되어 있는 순서는 우리들이 무대 위에서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 이 앨범을 바른 순서로 틀면 완전한 쇼를 듣는 것이 됩니다. 요컨대 우리들의 올바를 음악적 구조나 거기에 온 사람들과 함께 완성된 쇼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것은 이제까지 발표된 우리의 앨범 가운데 가장 창조적인 쇼입니다. ELP라는 그룹의 4년간의 결정이지요. 이렇게 해서 우리는 무대를 완성시켜 연주하는 것입니다. 만약 쇼를 본 사람이라면 시각적인 면도 포함시켜 우리들의 음악을 재음미 할 수 있을테지만...”
이 앨범을 발매한 직후인 7월 7일자 Melody Maker誌는 이들이 영국을 떠나 미국으로 이주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해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그 이유로 가장 큰 것은 세금 문제 그리고 영국의 슈퍼 그룹이 과거에 그렇게 해온 것처럼 미국에서의 광범위한 지위를 얻으려고 하는 것들을 들었다. 당시 이들은 실제로 이들의 전체 수입의 83%를 세금으로 내야만 했다고 한다.

위기의 ELP 그리고 각 멤버의 솔로 앨범 준비
이들이 세금등의 문제로 괴로워 하고 있을 무렵 Keith의 솔로 앨범 진행 상황이 주목을 끌고 있었다. 그는 앨범을 완성시키기는 했지만 그 내용, 발매일 따위는 일절 밝히지 않고 있었다. 다만 Keith가 계속해서 Carl과 함께 일할 가능성이 있다는 뉴스만 전해질 뿐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두명의 솔로 앨범을 준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또한 이들 세명의 멤버들은 그룹을 유지해야만 한다는 극도의 긴장감에 모두 피곤해 있었다. 특히 Greg은 본능적인 작용으로 무신경하게 임하는 자신의 공연 자세에 크게 후회하고 있었다. 이렇게 자신들의 에너지를 다 써버린 이들은 74년 여름 미국 공연에서 돌아온 뒤로는 일체의 소식을 끊어버렸다. 물론 멤버 각각은 그후에도 솔로 싱글을 발매하기도 하고 TV나 콘서트에 얼굴을 내미는등 활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Manticore 레이블 관계자들은 ELP가 활동을 정지한 몇 년 동안 그룹의 화제에 관해서는 전부 노 코멘트로 일관했다.

해체의 조짐 그 마지막 정리 - “Works" & "Works Vol. II"
1_front.jpg2_front.jpg77년 1월 이들의 새 앨범인 “Works"가 3월말에 발매될 예정이라는 소식이 떠돌았다. 소문 그대로 발매된 이 작품은 더블 앨범으로 공개 되었는데 A,B,C 면은 각자가 맡았으며 D면 한 부분만이 세명의 멤버가 한데 모여 만든 것이었다. 따로 또 같이, 그 갈라섬이 이 작품을 통해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A면은 Keith가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공연하고 있으며, Baus은 보컬과 어쿠스틱 기타가 가미되어 음악적 완성도가 높은 Greg, C면은 Joe Walsh의 슬라이드 기타에 힘입어 젊음에 넘치는 싱싱한 플레이를 전개하는 Carl 그리고 D면에는 아직도 건재한(?) 이들 세명의 앙상블이 실려 있다. ”Works"에 이어 이들은 8개월 후에 “Works Vol. II"에 발표했다. 이 새 앨범은 전작인 "Works”와 같은 쟈켓인데 단지 검은색을 흰색으로 바꾸었을 뿐이다.

아쉬운 해체에 이어 또다른 헤쳐모여
"Works" 와 "Works Vol. II"가 골드 앨범을 기록하자 이들은 카나다 공연에 나섰다. 가나다 공연의 하이라이트를 담은 “In Concert"는 그들이 해산된 후인 1979년 11월에 공개되었다. 그리고 카다나 공연을 마치고 스튜디오로 돌아온 이들은 78년 12월 졸작인 ”Love Beach"를 발매한 뒤 아쉽게 해산하고 만다. 이렇게 아쉬운 해체를 하고 난 뒤 세명의 멤버들은 각자 솔로의 길을 걷게된다. Carl Palmer는 당대 최고의 뮤지션들로 구성된 슈퍼그룹 Asia에 참가 했으며, Keith는 영화음악 분야에서 재능을 보였으며, Greg 역시 나름대로의 솔로 활동을 해나갔다.
그러나 ELP의 멤버들이 재결성 되리라는 소문에 84년부터 떠돌기 시작했다. 결국 이 소문은 사실로 드러나게 되었는데, 85년 Asia에서 활약하는 Carl대신 브리티쉬 록계의 전무후무한 드러머인 Cozy Powell을 영입해 또 다른 이니셜인 ELP라는 이름으로 86년에 새 앨범을 공개했다. 이 앨범은 세월의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예전의 이들 사운드를 접할 수 있는 곡도 없을뿐더러 이제 불혹의 나이를 넘어선 이들이 단지 음악에의 열정만을 가지고 만들었다는 것이 조금 민망하다 싶을 정도의 음반이었다. 또한 앨범 발매를 위해 한시적으로 가입한다는 조건으로 들어온 Cozy역시 제 기략을 발휘하지 못했다. 결국 이 프로젝트는 단 한 장의 앨범만을 공개한채 불발로 끝나 버렸다. Keith와 Greg은 새로운 멤버를 받아들여 예전의 영광을 재현해 보고자 했다. Carl에게 그룹의 복귀를 설득했으나 그가 새로 몸담고 있는 Asia가 기대 이상의 성공을 거두자 그것 또한 가망성이 없었다. 그래서 결국 GTR출신의 신예 기타리스트인 Robert Berry를 가입시켜 3 이라는 그룹명으로 88년 “To The Power Of Three"라는 타이틀로 새 작품을 공개했다.  이 앨범은 Geffen 레이블을 통해 발매 되었는데 당시 인기 절정이었던 Asia를 의식해 소속사를 옮겨 앨범을 발표해 아쉬움을 남겼던 작품으로 기록된다. Powell을 끌어들여 만들었던 작품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곡들로 차여진 이 앨범은 앞선 앨범과 함께 단지 자신들이 아직도 건재하다는 것을 팬들에게 보여준 작품에 불과하다. 하지만 40이 넘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단지 식지않은 음악에의 열정을 가지고 창작 활동에 전념하는 그들의 노력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Robert Berry라는 신참 역시 관록을 자랑하는 Keith와 Greg의 분위기를 익히지 못하고 그 역시 도중 하차 하고 만다. 이러던중 과거 Atlantic 레코드사의 사장으로 있는 Phil Carson의 도움으로 Asia의 해산이후 Carl Palmer가 다시 이들과 합류해 91년 10월부터 이듬해 1월에 걸쳐 작업했던 새 앨범 “Black moon"이 Yes의 재기 앨범 제작에도 참여했던 Mark Mancina의 제작으로 공개되었다.
이제 속일수 없는 나이만큼의 얼굴을 하고 있는 이들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볼때마다 20여년전 젊은 패기로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었던 예전의 모습이 그 위로 오버랩 되어지곤 한다. 당시의 작품들에서 느낄수 있었던 짜릿함이나 절묘함 보다는 ‘이제는 거울 앞에 다가선 누님’처럼 그 찬란했던 영예와 오욕을 넘어선 담백한 어조로 아직도 그들을 기억하는 많은 팬들에게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추억으로 ELP라는 이름은 새겨질 것이다.

글을 마치며...
장문의 ELP기사를 쓰면서 그리고 그들의 빛바랜 앨범을 다시 꺼내 들으며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갔다. 감각이 아무리 새것을 쫓는다 해도 좋은 것은 언제 접해도 좋다는 아련한 느낌.. “Oldies but Goodies"라고 했던가? 치열한 고통을 이겨내고 나온 그 예술적 정화(精華)는 언제나 듣는이로 하여금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글 : 이 춘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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