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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40

RIO

마음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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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수 : 18232
2010.03.06 (20:46:21)

락 음악의 경계를 확장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며, 어떤 부단한 시도와 실천을 요구하는 것일까? 많은 음악인들이 꿈꾸어왔던 것은 단지 대중적 인지도의 비틀즈 수준이나 엘비스 수준에 머무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통해 음악의 새로운 범주가 탄생하고, 경계없는 확장으로 음악이 발전적으로 진행되어가는 역사적 시기가 만들어지기를 바랬을 것이다. 20세기에 탄생한 문화라는 개념은 예술과 대중 문화의 선을 명백하게 그었고, 대중 음악의 경우 그 완고한 선을 넘기가 힘든 상황 안에 들어섰지만, 그 안에서도 락 음악은 시대정신과 예술적 자율성을 바탕으로한 독자적인 위상을 매번 새롭게 정립해나가고자 했다. 이러한 시도들은 상업적 전략에 치중한 판매고 중심의 락의 역사에서는 상당 부분 배제되었지만 그러한 흐름들은 쉽게 사그라드는 것은 아니다. 경계를 넘어가고자 한 시도를 했던 음악인들은 락의 주변부이면서 동시에 락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이다. ‘락 음악은 가장 합법적이며 강력한 매체이다’라고 선언했던 크리스 커틀러의 RIO 강령을 필두로 제대로 쓰여지지 않은, 혹은 미완으로 남아있는 락의 역사에 대해 부분적으로나마 고찰할 기회를 갖도록 하자.

 

Rock In Opposition

 

그들은 음악적, 경제적 독립을 통해 예술적 자율성을 획득한다는 것을 어떻게 정의했으며 이를 위해 어떤 방안을 제시했는가?
율리우스 2세는 미켈란젤로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천사의 날개는 이런 식으로 그려야지, 다르게 그려서는 안되네.” 아마도 이러한 관계는 (헐리웃의 영화 제작자인) 어빙 탈버그와 (헐리웃으로 건너간 독일의 영화감독인) 폰 스트로하임 사이에도 있었음에 틀림없다.(by 고다르)

 

1978년 3월 12일, 영국의 뉴 런던 씨어터에서 행해진 공연의 제목은 ‘Rock In Opposition’이었다. 무엇에 반대하는 락인가? 이것은 영국의 밴드 헨리 카우(Henry Cow)의 리더인 크리스 커틀러가 음악인의 자율적인 의사 결정을 통해 락 음악의 영역을 확장하는 예술적 시도들에 대한 긍정과 예술의 정치적, 사회적 입지를 동시에 굳히고자 한 의도에서 락을 다시 사고하고자 한 시도였다.

 

예술적 가치와 정치적 가치, 그 어느 쪽도 결핍되어서는 안된다. 두가지 전선을 동시에 구축해야만 한다. (by 1967년의 고다르, <중국여인>)

 

크리스 커틀러는 미국과 영국의 음악인들에 의해 행해진 음악적 양상들만이 정통적인 락으로 대우받으며, 그 안에서 만들어진 규범에 의해서만 락 음악이 산포되고 정의되는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또한 그는 음악인들이 전지구적 배급망을 가진 메이저 레코드사들에 의해 발탁되지 않고서는 제대로 음악적으로 평가받지 못하는 현실을 개탄한다. 이러한 메이저 레코드 회사들은 오로지 ‘이익과 위신’에 의해서만 음악인을 발탁하고, 그 음악적 결과물을 포장해 판매한다. 단련되지 않은 귀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단련하고자 할 의지도 없는 대중들을 향해 노래하고 연주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메이저 레코드 회사들에 의해 검증된 음악인들뿐이라고 주장한다. 정해진 궤도 안에서 더 이상 락이 발전되지 못한다면, 그래서 음악의 형식과 내용 모두가 동어반복의 정태적인 상태에 머문다면 더 이상 그것은 창조적인 가치를 갖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음악 내의 예술가의 부단한 분투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음악이 생산되고 배급되고 청중들과 만나는 전체 음악 산업 문제의 개선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므로, 크리스 커틀러가 예술에서의 전선과 정치, 사회적인 전선의 동시적인 구축을 고려했다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즉, RIO의 정치적 접근은 음악인들이 음악적 내용뿐 아니라 제작과 배급권에 있어서도 제어권을 가져야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1978년 3월에 ‘Rock In Opposition’의 기치 하에 모인 음악인들은, 먼저 RIO의 강령을 제시했던 크리스 커틀러가 재직하고 있던 영국 밴드 헨리 카우, 스웨덴의 잠라 맘마스 만나(Samla Mammas Manna), 이탈리아의 밴드 스토미 식스(Stormy Six), 프랑스 밴드 에트롱 푸 르루블랑(Etron Fou Leloublan), 벨기에의 밴드 위니베르 제로(Univers Zero)이다.

 

예술은 거울이 아니다. 예술은 망치이다. (by 존 그리어슨)

 

크리스 커틀러는 예술이 서구의 재현주의적 전통에서 벗어난 의식의 일깨움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다음의 다섯가지 사항을 RIO 팜플렛에서 이야기했다.

   *첫째, 음악 산업은 아무것도 창조하지 못한다. 그들은 오직 희생자들의 진정한 능력들을 착취할 뿐이다.
   *둘째, 음악 산업은 청중들의 욕망을 가능한 한 가장 낮은 수준으로 유지시키고자 한다. 왜냐하면 진정성을 가진 음악인들을 제어하기는 어렵지만, 반면에 (음악을 제조해내는) 판에 박힌 법칙들은 재생하기가 쉬울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음악 산업은 이익과 위신에 근거해서 모든 사항을 결정한다. 그들은 오로지 돈이 굴러가는 소리만을 듣는 귀를 가지고 있으며, 희생된 자의 피만으로 작동하는 가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넷째, 카프카는 오직 진실한 것만 썼다. 그러나 그러한 편집증은 인간 가치를 자본주의 체제 하에 둔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 불과하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다섯 번째, 독립은 유효한 단 하나의 첫 번째 단계이다, 만약 혁명이 그 두 번째 단계가 된다면.

 

음악인의 미학적, 경제적 독립을 요구하는 크리스 커틀러는 1978년 12월에 RIO 음악인들을 한자리에 모아 그들이 나아갈 바에 대한 토론을 주재한다. 그는 먼저 이론적인 문제들, 즉 정확하게 무엇이 ‘락’을 구성하는가, 경제적이며 미학적인 ‘반대’를 구성하는 것은 무엇인가, 즉흥의 위상과 이론, 음악과 정치적 행동의 연관성은 무엇인가를 제시했고, 두번째로 실제적인 문제들, 즉 이러한 기치 아래에 모인 밴드들을 위한 공연 스케줄과 배급망, 익스페리멘틀 음악을 환영하는 에이전시나 스튜디오, 출판업자, 배급업체, 장비 대여업체에 대한 정보망을 구축하는 것에 대해 논의하고자 했다. 그러나 12월의 논의는 RIO의 해산을 불러일으키고 마는데, 이 자리에 모인 밴드들간의 의견 차이가 분명했기 때문이다. 어떤 의견 차이가 있었을 것인가? 크리스 커틀러의 글과 RIO에 대한 글들에서 보면 다음과 같은 점이 지적된다. 무엇보다도 이들 다섯 밴드 중 이탈리아의 스토미 식스는 68년 이후 유럽 학생운동이 불러왔던 정치적 행동에 대한 요구에 충실하게 부응했던 밴드였고, 실제로 이탈리아 공산당 선거에서 정치적으로 활동했던 프로파간다 밴드였다. 이들에게 자신들의 음악은 이탈리아 내의 사회적 투쟁의 맥락에서 제대로 된 의미를 획득할 수 있는 것이었다. 반면, 위니베르 제로는 사회적, 정치적 고려 사항에 대해 방임적 태도를 취했으며, 잠라 맘마스 만나와 함께 예술지상주의적 경향이 강했다. 크리스 커틀러는 위니베르 제로야말로 ‘음악의 서구적 정신을 재발견하고자 하는 욕망이 존재하는’ 밴드라고 보았으며, 잠라 맘마스 만나는 그에게 파우스트와 동일한 위상에서 음악적 영향력을 행사한 밴드였다. 크리스 커틀러에게 휴머니티와 음악은 동일한 것에 다름 아니었고, 스토미 식스의 그 어떠한 사회적 책무에 대한 주장만큼이나 위니베르 제로의 음악에 대한 책무 주장은 중요한 것이었다. 크리스 커틀러는 후일의 인터뷰에서 주장하듯이, 락에 대한 사회적 책무는 자신들이 음악 언어의 확장을 위해 택했던 즉흥과 전자음악, 현대적 작곡의 양상에 대한 책무와 서로 보완관계에 놓인 것이었다. 크리스 커틀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RIO는 락의 추적가능하고 선형적인 발전의 끝에 온 것이다. 서서히 재즈, 현대 음악, 전자 음악, 즉흥과 민속 음악의 요소들을 도입하면서, 미학적이며 상호소통적인 절충주의적 음악 언어가 엄청나게 풍부해졌던 것이다. 그리고 68년을 전후로, 중심이 해체되는 거대한 분화가 있었는데, 이것은 음악에서뿐만 아니라 문화 전반에서 그러했다.

 

크리스 커틀러가 꿈꾸었던 음악을 통한 연대는 RIO가 유명무실해진 다음에도 그의 레커멘디드 레이블과 ReR 레이블을 통해 이어져갔다. 실제적으로 RIO에 참여했던 밴드로는 위의 다섯 밴드 외에도 아르 조이(Art Zoyd)와 악삭 마불(Aqsak Maboul), 헨리 카우의 발전적 해체 후 재결성이라고 일컬어지는 아트 베어스(Art Bears) 등이 거론된다. 국내에서 80년대에서 90년대에 이르러 형성되었던 광범위한 음악팬들을 거느리게 되었던 프로그레시브 락, 또는 인스트루멘틀 락, 아트 락이라고 불리우는 장르에서 세분되어 채임버 락이라고 불리는 범주에 속하는 헨리 카우는 가장 비타협적이며 가장 익스페리멘틀한 양식 하에서 락 음악의 확장을 시도했던 밴드 중의 하나로 간주된다(헨리 카우에 대한 국내 청자들의 예전 글들이 koreanrock.com에 올라와 있으니 이를 참고하시기 바란다). 헨리 카우와 아트 베어스는 크리스 커틀러 외에도 실제적인 음악적 주역이었던 프레드 프리스, 팀 호지킨스, 슬랩 해피의 다그마 크라우제, 린제이 쿠퍼 등을 포괄하는 여러 프로젝트들로 나아갔고, 이들이야말로 가장 RIO 강령이 의미하고 꿈꿔왔던 바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무리들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80년대 초반, 프레드 프리스는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반적으로 음악계의 사정은 단지 사람들이 연주하고 듣는 것만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또한 이 시스템 속에서의 복잡한 관계들과 비즈니스의 압력에 의해서도 결정된다. 레코드 회사, 잡지들 그리고 라디오 방송들은 유행을 위해서 음악의 모든 아이디어를 판매촉진을 위한 수단으로 계속 사용한다. 비즈니스는 언제나 - 매주마다 독창적이고 새로운 어떤 것이 등장하도록 - 구성물의 빠른 전환을 요구한다. 레코드 회사들은 특히 많은 양의 상품들을 만들어 내기 시작하고, 그리고 거기서 누가 뜨는가를 보는 식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그들이 증명된 시장으로 자리를 잡으면, 시장에 딱 들어맞는 그 상품만 판매한다. 요즘은 돈이 없기 때문에 예전처럼 무식한 방법을 쓰진 않는다. 하지만 그런 기본적인 성향은 계속 남아있다. 대부분의 프로페셔널한 음악들은 완전히 이러한 형태다. 청부업자 같은 사람들의 손에 잡혀있는 꼴이다. 그런 사람들이란 바로, 에이전트나, 출판관계자, DJ, 평론가 등이다. 그 사람들은 언제나 사이에 끼어 들어 이미지들을 만들어내고 분해시키려 한다. 가령 예를 들면, 평론가들은 메이저 레이블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절대 쓰지 않는다. 가끔 마이너 레이블에서 나온 판이 있더라도 그들은 거의 - 아니, 확실히 - 취급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반대로 새로 나온 데이빗 보위 앨범은 듣고 또 듣고 하면서 확실한 평을 탈 때까지 듣는 것이다.

또한 프레드 프리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현재 수십개의 대안적 레이블과 더 많은 대안적 그룹들이 존재하며, 이들은 기존의 소통 방식과는 별도로 서로간의 의사전달을 행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러한 레이블과 음악들이 대중의 입맛에 거의 영향을 주진 못했다. 그러나 그들의 영향력은 이후 매우 중요하게 되어질 수 있는 어떤 것의 시작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크리스 커틀러의 말처럼, RIO 강령으로부터 20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이미 그러한 시도들이 음악인들 내부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러한 사고들이 막대한 파급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해도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밴드들이 영미 중심의 락 음악과는 다른 방향에서 락을 사고하기 시작하고 있는가, 그것은 단지 독창성의 측면에서 우위를 점유하기 위해 앵글로-색슨 중심의 락 정통을 위반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락 음악은 ‘분화와 확장’을 통해 또다른 창조적 실험과 인간성에 기여하는 예술 양식으로서의 방향을 부여받고 있는 여전히 모로 가는 삶인 것이다.


   *이 글은 전에 야심차게 시도해보려던 '모로 쓰는 락의 역사'의 첫꼭지입니다. 그때 10회분까지 계획을 짰는데, 3회분만 달랑 쓰고 말았죠. 언젠가는 다시한번 써보고 싶네요. 특히 RIO 원고를 쓰는데 많은 도움을 준 장신고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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